투수로 입단 계약한 김성한 타자 원했지만 팀 사정상 투수 겸업 1982년 10승-13홈런-69타점 했지만 해태는 계약금 더 안줘 대신 메리트로 한 경기에 130만원 따간 추억이 새록새록 투타겸업은 팬들에게 새 볼거리 주고 유망주에게 선택의 기회 안겨 두 종목에서 모두 잘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 김건우 송진우 이대진 등 김성한의 대를 이을 수 있었던 아쉬운 재목들
메이저리그에 충격을 안긴 오타니 쇼헤이(23·LA 에인절스)는 많은 야구의 전설들을 기억 저편에서 소환했다. 그가 투타겸업선수로 10승-10홈런에 도전하자, 1918년 위대한 기록을 세웠던 100년 전 보스턴 레드삭스의 베이브 루스가 야구팬들의 조명을 새로 받고 있다. 해태의 김성한도 마찬가지다.
KBO리그 최초의 투타겸업선수였던 김성한은 1982년 투수로서 10승5패1세이브에 방어율 2.88을 기록했고, 타자로서 타율 0.305(318타수 97안타)에 13홈런 69타점을 마크했다. 해태의 심장과 같은 존재로 KBO리그 14시즌 통산 207홈런 1389안타 15승10패2세이브를 남긴 그는 KIA 타이거즈 감독을 거쳐 현재 CMB광주방송에서 야구해설을 하고 있다. 해태 담당기자로 김성한을 오래 지켜봤던 기자는 1995년 현역 은퇴경기 때는 물론이고 1996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코치 연수시절 함께했던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나주혁신도시에서 유명한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선수 때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김성한과 모처럼 연락이 닿았다.
● 1982년 투타겸업 김성한의 탄생은 해태의 특별한 사정 때문
-요즘 오타니 때문에 김성한이 위대한 선수였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그 당시는 내 야구지식이 짧아 그 것을 몰라봤다. 정말 미안하다. 오래 전 일이지만 어떻게 해태에서 투타겸업을 하게 됐나?
“(웃으면서)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1982년 해태 입단 때 투수로 계약했다. 군산상고에서 투수로 뛰었고, 동국대학교에 가서도 1학년 때까지는 투수로 공을 던졌다. 그러다가 팔꿈치 부상을 당했고, 2학년 때부터 타자로 전향했다. 공을 던지면 팔이 아프니까 대학 때는 간간이 투수로 나갔고 주로 타자를 했다. 프로입단 계약을 했지만 투수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당시 해태 창단 멤버가 14명으로 워낙 적었고, 투수 숫자도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던졌다(당시 해태는 강만식 김용남 이상윤 방수원 등 4명이 투수 엔트리의 전부였다. 이들로 한 시즌 80경기를 소화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김동엽 감독이 투수에 펑크가 나거나 경기 도중 우리 투수가 흔들리면 나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때만 해도 선수의 뜻과 관계없이 감독이 무조건 하라고 하면 할 때였다.”
-투수와 야수는 훈련과 준비과정이 다를 텐데.
“1982년 프로야구 개막을 준비하면서 투수를 계속하면 팔꿈치가 망가져 내 선수인생이 일찍 끝난다는 생각에 틈틈이 3루수 연습을 했다. 그러면 코치들이 ‘왜 투수가 야수 훈련을 하나’라고 핀잔을 주면서 가라고 했다. 다른 야수들의 눈초리도 좋지 않았다. 그러면 ‘투수 수비훈련을 겸해서 한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3루수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해서 프로야구 개막을 투수 겸 3루수로 맞았다. 주전 경쟁에서 내가 이겨서 3루를 차지했다. 당시 3루 경쟁자는 임정면이었다(1루수는 김봉연이었는데 나중에 김성한의 역할이 커지면서 김봉연은 지명타자가 됐고 김성한은 1루수로 고정됐다).”
-아무리 프로야구 초창기라도 시즌에 10승-13홈런을 기록하기는 쉽지 않은데.
“당시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해 26경기에 등판했는데, 5번만 선발로 나갔고 나머지는 구원이었다. 선발로 완투 3번, 완봉 1번을 했고 나머지는 구원승이었다. 3루수를 보다가 상황이 되면 김동엽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와서 ‘어이 이리 오라우’하면서 내게 손짓을 했다. 그러면 마운드에 가서 던지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반기에만 10승을 했는데 나중에는 팔꿈치에 탈이 났다. 결국 후반기에는 거의 던지지 못했다(김성한은 1982년 투타겸업을 하면서도 80경기 전 경기에 출전했다. 놀라운 체력과 투지였다).”
-올드 팬이 아니라면 1982년 당시 김성한이 어떤 투수, 어떤 타자였는지 잘 모를 것 같다. 본인 스스로 투수와 타자로서 어떤 선수였는지 설명한다면.
“컨트롤 투수였다. 팔 스윙이 짧고 변화구를 던지는 스타일이다. 당시는 스피드건이 없었지만, 스피드는 시속 140㎞대 초반 정도였을 것이다. 대신 제구력이 있었다. 슬라이더와 커브, 슈트를 주로 던졌는데 몸쪽, 바깥쪽으로 던지는 제구력으로 타자를 상대했다. 방망이는 처음부터 눕히고 쳤다. 해마다 배트는 점점 더 눕혀졌고, 그래서 오리궁둥이 타법이라는 독특한 폼이 됐다. 내 타격 자세는 어느 코치도 간섭하지 않았다. 워낙 독특한 폼이라 내버려뒀다. 독학하다시피 하면서 나만의 감각과 자세를 만들었다.”
● 해태 김성한이 기억하는 투타겸업의 뒷얘기
-1982년 시즌 뒤 투타겸업을 했다고 계약금을 한 번 더 받았다던데.
“사실이 아니다. 해태가 어떤 구단인데…. 1982시즌에 투수로 10승, 타자로 13홈런을 치고 69타점으로 타점왕을 하자 매스컴에선 ‘김성한이 혼자서 투수, 타자 2명의 역할을 했으니까 계약금을 더 줘야 한다’는 기사를 써줬지만 구단은 돈 한 푼 더 주지 않았다. 다만 투타겸업으로 재미는 봤다. 당시 라이벌 롯데와의 경기 때는 한 경기에 500만원의 메리트를 걸었는데, 혼자서 130만원을 따간 적은 있다. 안타, 홈런, 승리투수 등 성적에 따라 돈이 걸렸는데 내가 안타도 치고 승리투수가 돼서 많은 돈을 가져간 적은 있었다. 투타겸업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것은 삼성전이었다. 팀이 뒤지던 6회에 등판했는데 내가 잘 막고 결승타를 쳐서 역전승한 날이었다. 신문에서 ‘김성한 북 치고 장구 치고’라고 제목을 뽑아준 경기였다(당시 야구기록지를 찾아보니 5월 15일 무등경기장에서 벌어진 경기였다. 0-1로 뒤진 6회 구원등판한 김성한이 7회 2점홈런을 쳤고 연장 11회말 끝내기안타를 쳐서 3-2로 이겼다). 되돌아보면 재미있게 투타겸업을 했다. 힘들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결국 투수로서 4시즌 동안 통산 15승10패를 했는데 가장 기억나는 경기는?
“1983년에 딱 1승을 했는데 광주에서 열린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가 가장 기억난다(당시 전반기 1위를 달리던 삼미를 해태가 6월 7일부터 벌어진 3연전에서 싹쓸이하고 전반기 우승의 길을 닦았던 시즌의 분수령 경기였다. 김성한은 3연전 2차전에 선발로 등판해 5-0 완봉승을 거뒀다). 그 해에는 투수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 김응용 감독도 투수로 자주 던지게 하지도 않았다. 그해 4경기에 출전했는데 3번이 선발로 나간 것이었고, 삼미 경기가 유일한 완봉승이었다. 그날은 투수진에 구멍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전날 연습피칭도 없이 선발로 나갔다. 사실 팔꿈치가 아파 공을 많이 던질 상황도 아니었고, 그래서 투수연습은 생각도 못했다. (김성한은 그날 경기 뒤 인터뷰에서 ‘전날 김응용 감독이 마운드에 서라고 해서 구원투수로 나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결국 나중에 팔꿈치에 탈이 나서 1991년 미국 LA에 가서 프랭크 조브 박사의 집도로 토미존 서저리를 받았다. 내가 수술을 받고 나오고, 그 다음으로 쌍방울 시절의 김기태 감독(KIA)이 수술실에 들어가서 수술을 받은 기억이 난다.”
● 김성한의 투타겸업 예찬과 야구 꿈나무에게 주는 조언
-요즘 오타니의 투타겸업 도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투타겸업은 27~28세까지 젊었을 때라면 한 번 해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는 체력이 되니까 문제없다. 나도 그때는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요즘 오타니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던지도록 등판간격을 조정해주고, 선발로 던진 다음 날 쉬게 해준다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를 겸업하다보니 투수로서 어떻게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지 요령도 생기고 재미는 있었다. 프로야구는 팬들의 흥미를 높여야 하는데, 투타겸업은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투수가 지명타자로 출전하면 다른 반쪽선수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되니까 그런 것은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투타겸업 아닌가?
“그렇다. 투타겸업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 시스템에서 정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갈수록 선수의 업무가 분업화되는 상황에서 선수가 투타겸업을 하더라도 천천히 기다려줄 수 있을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프로야구는 결과는 빨리 보고 싶어 하는데, 투타에서 모두 잘 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문화가 있어야 투타겸업이 가능하다. 오타니는 메이저리그 계약서에 등판간격까지 넣었다고 들었다. KT 강백호도 투수와 타자로 모두 재능이 있는데 이제 막 고등학교를 나온 선수가 투수를 하면 처음에는 제대로 프로 타자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KT 김진욱 감독이 먼저 야수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만일 야구 꿈나무가 투타겸업을 꿈꾼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사실 어릴 때 야구는 잘 던지는 선수가 잘 친다. 주장이 4번타자를 하고 투수를 한다. 요즘은 학생야구도 분업화 추세지만, 야구는 잘하는 선수가 무엇이든지 잘한다. 그런 선수에게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재능을 개발해주고 선택의 기회를 높여주기 위해서라도 투타를 모두 경험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해태시절 후배 최해식의 아들도 야구를 하는데 아버지는 투수를 원하지만, 나는 타자로서 몸이 좋으니 이것저것 다 해보라고 충고했다. 그래야 나중에 프로 지명을 받을 때도 좋고, 설령 한쪽이 안 되더라도 다른 쪽에서 숨겨진 능력을 발휘할 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연습과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되돌아보면 우리 프로야구에는 투타겸업이 가능한 좋은 재목이 많았다. MBC 김건우도 그렇고 빙그레 송진우, 해태 이대진 등이 그랬는데.
“역대 후배들을 생각해보면 송진우는 타자로서도 재능이 컸는데 결국 투수로 한쪽을 선택해 성공한 사례다. 이승엽도 투수 대신 타자를 선택한 경우다. 이대진도 타자로서는 아까운 재목이었다. 내가 KIA 감독 시절 이대진이 어깨 부상을 당한 뒤 힘들어할 때 면담을 통해 타자전향을 권한 이유였다. 아직은 젊은 선수에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주고, 또 타자를 하다보면 어깨의 부상 부담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권유했다. 이대진은 연습배팅에서는 잘 쳤지만 경기에서는 그만큼을 보여주지 못해 결국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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