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p Of Life, 나의 월드컵] ④ 히딩크 통역 전한진 “2002년의 교훈? 즐기는 자 못 당한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4월 20일 05시 30분


‘히딩크의 입’으로 유명했던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은 2002년 월드컵을 교훈 삼아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선수들은 즐기는 경기를 하고, 팬들은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길 부탁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히딩크의 입’으로 유명했던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은 2002년 월드컵을 교훈 삼아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선수들은 즐기는 경기를 하고, 팬들은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길 부탁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최고의 취재원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무게감은 엄청났다. 그런데 공식 인터뷰를 제외하고 그를 따로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그 다음 취재원은? 히딩크의 통역이었다.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그만한 취재원은 없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꼬드겨도 입을 굳게 닫았다. 히딩크와 한국축구를 위해 말을 아꼈다고 했다. ‘히딩크의 입’으로 1년 6개월을 보낸 그는 스포츠 통역의 전형으로 통한다. 전한진(48)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은행원이던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캐나다에서 5년을 보냈다.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했다. 영어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부지런하고, 눈치 빠르고, 사교성도 좋다. 외국인 감독을 통역할 적임자였다. 2002년을 포함해 5개 월드컵대회를 경험했다. 20여 년 전 우연히 맺게 된 축구와의 인연은 그렇게 ‘운명’이 됐다. 대표팀 지원과 국제파트를 주로 맡았던 그는 지난해 11월 축구협회의 살림을 챙기는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행정도 경기력이 뒷받침돼야 빛이 난다

-사무총장의 역할은.

“조직 운영을 중심으로 집안 살림을 한다. 홍명보 전무님과 역할 분담이 적절히 이뤄졌다. 전무님은 축구와 직접 관련된 제도나 기술, 정책 등에 깊이 관여한다. 서로의 특성을 살린 분담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말 조직개편 후 변화된 것이 있다면.

“경기인 출신 무관과 행정을 하는 문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자의 경험과 노하우, 네트워크를 살릴 수 있도록 짜여졌다.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 균형을 맞췄고, 그러면서 시너지를 내고 있다.”

-축구행정의 어려운 점은.

“팬들의 기대와 눈높이가 올라가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실력이나 결과가 따라주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대표팀 지원을 위한) 행정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하더라도 경기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빛이 나지 않는다.”

-축구협회가 대표팀 위주의 행정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규모나 수준을 봤을 때 아직까지는 대표팀 성적에 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대표팀 성적이 나고, 그게 이슈가 되고, 또 관심이 고조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관중이 는다. 많은 관중 앞에서 대표선수들은 더 열심히 뛰게 된다. 이게 또 다시 성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한국축구의 전반적인 틀을 잡아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맨 오른쪽). 왼쪽에서 네 번째가 당시 전한진 통역.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맨 오른쪽). 왼쪽에서 네 번째가 당시 전한진 통역.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히딩크는 독재자인 척하는 전략가

-히딩크 통역을 맡게 된 계기는.


“현대종합상사에 다니다 축구협회에 파견된 1997년부터 국가대표팀 지원을 했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축구협회는 외국인 감독을 선임했고, 자연스럽게 통역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외부 전문 통역을 뽑으려고 했지만, 히딩크가 축구를 알고, 조직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요청해 내부 사람으로 좁혀졌다. 처음에 윗분께서 내게 통역 제의를 했을 때 3일간 고민하다가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아 거절했다. 윗분의 실망과 섭섭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번 더 생각해보라는 권유에 기분 좋게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히딩크와 처음부터 호흡이 잘 맞았나.

“절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티격태격했다. 낯선 땅에 온 히딩크가 의심을 많이 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또는 축구협회를 욕하면서 나를 시험해보기도 했다.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다가 나에 대한 확신이 든 순간에는 모든 걸 다 보여주더라. 그 기간이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이후 서로를 이해했고, 믿음이 생겼다.”

-히딩크가 통역을 상대로 큰소리도 많이 냈는데.

“팀 분위기를 위해서 내가 희생을 많이 했다.(웃음) 예를 들면, 훈련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나더러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가 있어라 명령하거나, 대기하고 있다가 부르면 재빨리 달려 가야했다. 천천히 걸어가면 구박을 줬다. 또 들어가자마자 바로 나가라고도 했다. 이걸 몇 번씩 되풀이 했다. 곁에 있던 선수들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이는 선수단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히딩크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아무리 친해도 서로 얼굴 붉힌 적이 있을 텐데.

“미리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준비가 안됐다고 감독이 혼을 내기에 크게 반발한 적이 있다.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히딩크도 당황하더라. 그가 조크였다며 이해를 구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던 시절 얘기다. 그래서 내가 제의한 게 우리가 장단을 맞출 수 있도록 미리 힌트를 달라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우린 죽이 잘 맞았다.”

-통역의 역할은.

“말만 전달하는 건 무책임하다. 말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의미를 전달해야한다. 특히 한 팀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감독이 잘못 말한 것 같으면 재차 물어서 바로 잡아주고, 그런 상황을 선수들에게 설명해주는 것도 통역의 역할이다. 또 팩트가 틀린 건 통역이 알아서 바로잡아 사실을 전달해줄 필요도 있다.”

-곁에서 본 히딩크는 어떤 지도자였나.

“독재자인척 하는 전략가다. 모든 게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모든 상황에 맞춘 자기만의 매뉴얼이 있다. 기분 좋을 때와 나쁠 때, 우스개 소리를 할 때 등등 상황에 맞는 매뉴얼이 있고, 그걸 조금씩 응용했다. 컨셉트는 독재자이지만 결코 독재자는 아니다. 다만 그는 ‘여기서는 내가 보스다’라는 사실을 선수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히딩크의 성격은.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는다. 또 영화나 미드(미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 감성이 풍부했고, 흡수가 빨랐다. 축구에다가 이런 감성을 접목시킨 지도자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다른 분야를 통해 축구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말한 주옥같은 어록들도 영화나 미드에서 빌려온 게 많다. 드라마에서 번뜩이는 말들이 나오면 그걸 기억했다가 현실 상황에 맞춰서 잘 활용했다. 응용의 대가다.”

-히딩크와 선수들의 관계는 어땠나.

“독재자의 이미지에 선수들도 처음에는 불편해했다. 특히 고참들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고참들이 나이로만 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걸 불편해했다. 외국인 지도자 입장에서 보스는 한명이어야 하는데, 우리 현실에서는 보스와 고참이 공존한다. 그걸 견제했다. 보스는 한명이어야 하고, 또 다른 보스는 없어야하며, 책임은 본인이 진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코치들과는 잘 어울렸나.

“처음에 일어난 에피소드인데, 감독이 얘기를 다한 뒤에 다시 코치가 선수들을 모아 한마디 하는 걸 히딩크는 이해하지 못했다. 열을 많이 받았다. 팀의 철학적이고 정책적인 건 감독이 하면 되는데, 왜 코치가 다시 나서냐는 생각이었다. 우리끼리 으샤으샤 하는 문화를 이해 못했다. 시간이 지나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는 코치가 선수들 앞에 나서는 걸 용인해줬다.”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못 마땅하더라도 일단은 응원과 격려 부탁

-축구와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축구에 완전히 빠져들기 전에 경험한 대회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고, 축구의 대단함을 느끼면서 접근한 건 2012년 런던올림픽이다. 2002년엔 얼떨결에 통역을 맡은 것도 있고, 철이 덜 든 상태에서 만들어진 추억이 있다. 통역으로 내 역할에만 집중했다. 그 탓에 전 국민이 다 즐겼는데, 나만 못 즐긴 것 같다.(웃음) 경기가 끝나고 TV를 보면서 대단한 걸 느꼈지, 그 당시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반면에 2012년에는 지원뿐 아니라 동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 즉 패스 하나하나, 골 하나하나를 완전히 즐겼다.”

-즐긴다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다.

“역대 월드컵의 공통점과도 연관이 있다. 사실 히딩크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큰 대회에 나가서는 즐기지를 못했다. 상대의 신체조건이 좋다거나,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면서 긴장을 많이 했다. 그런데 2002년을 경험하면서 든 생각은 ‘즐겨야 120%의 경기력이 나온다’는 점이다. 즐기지 못하면 자기 경기력의 70%도 안 나온다. 신나서 할 때의 플레이, 동기부여가 됐을 때의 플레이와 쫓기면서 손을 쓰고 파울을 할 수 밖에 못하는 상황에서의 플레이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느꼈다.”

-가장 아쉽거나 안타까웠던 대회는.

“경기로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8강까지 못간 게 아쉽다. 16강 우루과이전은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다. 결정적인 찬스를 살리지 못했다. 행정적으로 봤을 때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네덜란드에 0-5로 진 뒤 감독님이 경질된 일이다. 당시 나는 초짜였는데, 왜 잘렸는지 영문도 몰랐다. 많이 당황했다.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감독님이 공항으로 가셨는데, 여권을 호텔에 두고 가신 것이다. 비행기 출발 40여분을 남기고 벌어진 일이었다. 캠프에서 공항까지 그 시간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우리 팀에 배속된 안전요원 중 아마추어 카레이서를 자칭하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목숨을 걸고 공항까지 간 적이 있다. 정말 식은땀이 났다. 당황과 황당이 겹친 대회였다.”

-1998년 대회에서 네덜란드 감독은 히딩크였는데.

“히딩크가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그는 한국과의 경기에 앞서 심리전을 폈다. 경기 전날 공식 훈련을 갖는데, 네덜란드가 먼저 했다. 거의 끝날 무렵 한국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왔는데, 히딩크는 자기 선수들에게 끝내지 말고 더 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선수들의 짜증을 유발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한국 스태프 중 어느 누구도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이 너무 착하다고 하더라. 히딩크는 우리 보고 ‘유아 소 나이스(You are so nice)’라고 자주 말하는데, 이는 너무 순진하게 경기를 하는 걸 비꼬는 표현이었다. 약간은 비신사적이라도 승부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러시아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의 행정 지원은 2002년 이후 상당히 높아졌다. 국제축구연맹(FIFA)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관심은 대표팀의 경기력이다. 월드컵은 엄청난 부담이 되는 대회다. 즐기라고 말은 하지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팬들께서 도와줬으면 한다. 못마땅한 것이 있더라도 일단은 응원해줬으면 한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떨어지는 부분을 우리의 응원으로 메워주었으면 한다. 실수하지 말아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팬들께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잘못이 있다면 대회 끝난 뒤에 혼을 많이 내더라도, 월드컵 끝날 때까지는 정신적으로 응원주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으면 한다.”

● 전한진


▲출생=1970년(서울)
▲학력=연세대 영문과 졸업
▲경력=현대종합상사 입사(1995년) 대한축구협회(1997년∼현재)
▲주요 보직=프랑스월드컵 행정담당(1998년), 한일월드컵 히딩크 감독 통역(2002년), 독일월드컵(2006년)· 베이징올림픽(2008년)· 남아공월드컵(2010년)· 런던올림픽(2012년)· 브라질월드컵 지원팀장(2014년), 축구협회 사무총장(2017.11∼현재)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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