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기에서 나오는 사인은 수백 개다. 두 팀 벤치의 지시와 1·3루코치들의 전달, 배터리의 의사교환, 내야수끼리의 사인, 내야에서 외야로 중계되는 사인, 심판들끼리의 신호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몇몇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가짜고, 몇몇은 진짜다. 사인은 야구를 멘탈 게임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두산 공필성 3루코치가 작전사인을 내고 있다. 스포츠동아DB
■ 사인 커닝은 죄? ML선 사인 잘 훔치면 ‘능력자’
NY장수코치 플레처 훔치기 달인 내론은 사인 단순화로 개별 지시 투구패턴 노출로 WS 승패 좌우
LG의 KIA 사인 커닝페이퍼는 ‘야구의 묘미’ 지운 부끄러운 일
4월 18일 광주 KIA-챔피언스필드에서 경기 막판 드러난 LG의 상대 배터리 사인 공개 해프닝은 한동안 야구계의 안줏거리가 됐다. 커닝페이퍼 노출 또는 사인 훔치기 등 사건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본질은 하나다. LG는 프로야구팀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고, 이 때문에 당분간 창피스러운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점이다. ● 야구와 사인은 어떤 관계일까?
사인은 그라운드에서 오가는 은밀한 언어다. 야구를 다른 스포츠와 달리 ‘생각하는 게임’으로 만들어준 것도 사인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한 경기에서 오가는 사인은 수백 가지다. 이 중 몇몇은 진짜고, 몇몇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가짜다. 사인은 인체의 신경조직처럼 조용히, 그리고 순식간에 그라운드 곳곳을 누비며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사인을 잘 해독할 수 있다면 야구의 신처럼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상대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고 대비하는 야구는 일방적인 게임이 된다. 감독과 선수 입장에서 이보다 쉬운 상황은 없다. 팬과 선수를 가르는 경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인도 들어간다. 메이저리그에서 감독, 코치, 선수를 경험했던 웨스 웨스트럼은 야구를 이렇게 설명했다.
“야구는 교회와 같다. 누구나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지만 목사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소수다.” 모든 사람이 같은 야구경기를 보지만 각자의 해석능력에 따라 이해하는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순식간에 다양한 수신호와 동작을 통해 동료들끼리 전달되는 비밀의 언어를 해독하는 것은 야구를 더욱 깊게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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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의 숨겨진 언어-사인
야구와 관련해 많은 책을 썼던 폴 딕슨은 ‘야구의 숨겨진 언어(The Hidden Language Of BASEBALL)’에서 사인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전설적인 감독들의 발언을 통해 확인시키고 있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이자 감독인 조 크로닌은 “사인을 주고받고 전달하는 것이 팽팽한 경기를 이기게 한다”고 말했다. 현대야구의 아버지라는 브랜치 리키는 “감독이 그라운드의 모든 선수들을 통제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사인이다. 사인이 없으면 경기를 컨트롤할 수 없다”고 했다.
인체의 모든 기관을 연결해주는 신경망처럼, 야구에서 사인이 없다면 팀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사라진다. 만약 사인이 사라진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야구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보안이 생명인 사인
사인은 보안이 생명이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팀이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텍사스 레인저스 3루코치 제리 내론은 발상의 전환으로 보안을 유지했다. 사인을 단순화시켰지만 모든 선수들에게 각자 다른 사인을 냈다. 프레스톤 고메스도 이 방법을 썼다. LA 다저스 3루코치로 일했던 그는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더라도 25명의 사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른 팀에 노출될 염려가 없다”고 했다. 테드 윌리엄스 시프트로 유명한 루 부드로 감독은 클리블랜드를 지휘할 때 같은 사인이지만 3회마다 내용을 달리해 다른 팀에 혼란을 줬다. 뉴욕 양키스 케이시 스텡겔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인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 사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만 바꾸면 충분하다”고 했다.
이번에 LG의 해프닝으로 KIA 배터리의 사인이 노출됐지만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패턴으로 해도 사인의 의미만 바꾸면 상대팀은 고민한다. 센스 있는 배터리는 자신의 사인이 노출됐다는 의심이 들면 언제든지 사인을 바꾼다. 그래서 “사인을 상대팀에 노출시키면 3류, 상대팀의 사인을 훔치다가 들키면 2류, 상대가 당한 줄도 모르게 훔치면 1류”라는 말이 나왔다. “훔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야구속설도 같은 의미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사인을 잘 훔치면 일자리 보장되고 우승한다!
남들보다 눈썰미가 뛰어나서 상대의 사인을 잘 잡아내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가 널려있다. 뉴욕 양키스 아트 플레처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1927년부터 1945년까지 코치로 장수한 진짜 이유였다. 다른 코치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연봉도 많이 받았다. 박병호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해진 미네소타 트윈스 감독 폴 몰리터도 현역시절 상대의 사인을 잘 간파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사인 훔치기가 야구의 일부이며 이 기술에 따라 팀의 승패가 바뀌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사인 훔치기 능력으로 승패가 바뀐 유명한 경기가 몇 개 있다. 1913년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뉴욕 자이언츠의 월드시리즈 때는 전설의 코니 맥 감독이 자이언츠 투수들의 습관과 사인을 알고 준비한 덕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필라델피아가 4승1패로 압도했다. 1920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브루클린 로빈스의 월드시리즈도 비슷했다.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는 양키스 앤디 패티트와 애리조나 랜디 존슨-커트 실링의 투구습관이 노출된 채로 진행됐다. 2017년 LA 다저스-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월드시리즈는 7차전 다저스 선발 다르빗슈 유의 투구습관이 드러난 채로 초반 대량 실점한 것이 우승을 갈랐다.
● 사인 보안을 위해 등장한 창의적 방법들
각 팀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인을 해독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상대팀은 그럴수록 그 사인을 해독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벤치야구의 일부분이고, 전술의 탄생이다. 브랜치 리키는 “상대의 사인을 훔치고 싶다면 사인이 나오는 소스를 잘 살피라”고 했다. 어차피 결정은 감독이 한다. 감독의 다양한 동작을 통해 사인의 의미와 속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리조나주립대 보비 윙클 감독 때였다. 3루에서 다양한 사인을 내는 코치에게 진짜 사인은 단 하나 공을 기다리라는 것뿐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 모든 동작은 의미가 없었다. 대신 진짜 사인은 덕아웃의 선수들에게서 나왔다. 윙클 감독은 이름이 B로 시작되는 선수와 H, S로 시작되는 선수를 덕아웃 맨 앞자리에 앉혔다. B 선수가 움직이면 번트, H 선수가 일어나면 히트앤드런이었다. S 선수는 도루 사인을 전담했다. 이들은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경기 내내 상황을 지켜보면서 감독의 부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