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그라운드에 코치석이 만들어진 이유는?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5월 7일 1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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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린 ‘2018 신한은행 MY CAR KBO리그’ kt 위즈와 KIA 타이거즈 경기 8회말 1사에서 kt 유한준이 솔로 홈런을 친 후 그라운드를 돌며 고영민 3루코치의 환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29일 오후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린 ‘2018 신한은행 MY CAR KBO리그’ kt 위즈와 KIA 타이거즈 경기 8회말 1사에서 kt 유한준이 솔로 홈런을 친 후 그라운드를 돌며 고영민 3루코치의 환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최초의 프로야구팀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의 2인 사인시스템
담배로 투,포수 배터리 사인교환 시스템 만든 래리 코코란
마이크 킹 켈리는 지금 선수들이 사용하는 수신호 사인 개발
상대 선수 사인 훔치고 야유하는 코치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코치석
사인 시스템의 등장으로 농아 선수들에게도 희망이


최초의 프로페셔녈 야구팀은 1869년의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화려한 기술로 관중을 끌어 모았다. 이들은 다양한 사인을 사용했다. 전직 크리켓 선수였던 팀의 리더 해리 라이트는 “사인을 통해 팀을 잘 작동하는 기계처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1869년 9월 26일 ‘데일리 알파 캘리포니아’지에 처음으로 사인과 혁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그때 신시내티는 서부를 순회하며 캘리포니아 지역 팀들과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당시 기사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팀에서 사인을 내는 2명의 주장이 있었다는 것. 한 명은 중견수였고 또 한명은 포수였다. 이 기사를 통해 초창기 포수가 단지 투수의 공을 받기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료들의 수비 위치와 역할을 조율하고 지시하는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상대팀 타자와 누구보다 가까워 조그만 변화에도 가장 먼저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였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배터리가 등장하고 사인과 사인 훔치기도 동시에 나오다

이때부터 투수와 포수를 부르는 배터리(포대)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조준해서 대포를 쏘는 사람(투수)과 공격좌표를 유도해주는 사람(포수)의 관계가 투포수의 역할과 같다고 봤던 모양이다. 야구는 남북전쟁을 통해 대중화에 성큼 다가섰다. 전쟁에 참가했던 남과 북의 병사들은 쉬는 시간마다 야구를 즐겼다. 미국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야구가 급속도로 넓게 퍼져간 것은 전쟁기간동안 수많은 병사들이 부대에서 새로운 경기인 야구를 어떻게 하는지 방식을 배운 뒤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를 주위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지휘관은 병사들이 전쟁에서 필요한 다양한 신호를 훈련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야구를 적극 장려했다.

사인이 등장하자 사인 훔치기도 쌍둥이처럼 동시에 나왔다. 1876년 내셔널리그가 탄생하던 해에 사인 훔치기가 공식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이 터졌다. 하트포드 다크 블루스라는 팀이 사인을 훔쳤다고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경기장 밖에 있는 판잣집을 무대로 전봇대에 올라가 상대의 사인을 훔친 뒤 자기 팀의 선수들에게 몰래 사인을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수들은 이 것을 사인 훔치기라 여기지 않았다. 팁을 주는 것이라고 불렀다. 정직하게 수고한 상대에 팁을 주는 것과는 반대되는 뜻이었지만 금단의 기술은 곧 야구에 다양한 기회와 도전을 함께 떠안겼다.

● 배터리 사인교환 방식의 진화

경기가 발전할수록 사인교환 방식은 진화했다. 차츰 야구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래리 코코란은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는 시스템을 만든 최초의 투수다. 코코란은 1880년 루키 시즌에 43승을 기록했는데 특이하게도 입에 문 담배 덩어리를 이용했다. 이를 오른쪽에 물었느냐 왼쪽에 물었느냐를 이용해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실버 핀트도 비슷한 사인을 낸 선수다.

담배신호를 발전시켜 지금 야구에서 사용하는 손가락 신호를 생각해낸 사람은 시카고의 포수 겸 외야수 마이크 킹 켈리다. 그로부터 현대식 배터리 사인이 탄생했다. 포수의 손가락 하나는 빠른 공, 두 개는 커브를 의미했다.

● 1,3루 코치석의 탄생과 코치들의 역할

1870년대부터 야구는 매니지먼트 즉 감독의 역할이 정립됐다. 감독(매니저)은 선수들의 스케줄이나 상대 팀과의 경기일정을 챙기는 주무가 아닌 팀의 지도자로서의 개념이 자리 잡았다. 다른 종목들은 감독을 헤드코치라고 부르지만 야구만 유독 매니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감독 혹은 코치들은 1,3루 베이스라인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야유를 퍼부어 상대팀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자기 팀 선수들에게는 훔친 사인을 전달했다. 타석의 타자들에게 훔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코치들은 남북전쟁 때 사용했던 수신호를 사용했다.

1887년 코치들의 역할이 야구규칙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부터 1,3루의 코치석이 베이스라인에서 15피트(4.572m) 떨어진 곳에 생겼다. 캡 앤슨 등 몇몇 시끄러운 코치들이 베이스라인을 오가면서 상대를 야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반대로 이 박스에서 코치들이 능력껏 사인을 훔쳐 타석의 타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야구의 기본 시스템으로 정착됐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농아 선수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사인 전달 시스템

코치들의 사인전달 시스템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선수가 있었다. 윌리엄 엘스워스 호이였다. 그는 천부적인 야구능력을 가진 메이저리그 역사상 2번째 농아선수다. 1888년 내셔널리그 워싱턴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한 호이는 청각장애 때문에 비장애 선수만큼 빨리 볼카운트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 약점은 상대팀에게도 곧 알려졌다. 상대 선수들은 호이가 타석에 등장하면 볼카운트를 제대로 알기 전에 퀵피칭으로 호이를 곤란하게 했다. 코치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루코치가 호이 타석 때 사인을 냈다. 코치가 두 손의 검지를 라이트 쪽으로 향하면 스트라이크, 반대로 향하면 볼이라는 약속을 한 것이다. 호이는 이 사인시스템의 덕을 톡톡히 봤다.

호이는 통산 594개의 도루를 기록할 만큼 야구를 잘 했다. 비록 소리를 듣지 못해도 경기장에서 주고받는 사인만 잘 알면 플레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줬다. 인기선수였던 호이는 1889년 한 경기에서 홈으로 뛰어드는 주자 3명을 잡아내는 묘기도 선보였다. 이런 호이를 위해 관중들도 박수나 함성 대신 멋진 플레이에 찬사를 보내는 무언의 동작을 만들었다. 모자를 벗거나 두 손을 들어올리는 동작으로 호이를 칭찬했다. 파도타기 응원의 시작도 이때부터라고 본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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