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선, 마라도나 앞에서 통쾌한 중거리포… “자신감이 묘약”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7일 03시 00분


[그 순간 다시 온다면]<2>월드컵 한국 첫 골 박창선

한국의 ‘월드컵 1호 골’(19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오른쪽 사진) 주인공인 박창선 전 경희대 감독이 5일 경남 김해시 ‘박창선 축구클럽’ 사무실에서 서너 번의 촬영 시도 끝에 “이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32년 전 세리머니를 재연하고 있다. 김해=박경모 기자 momo@donga.com·동아일보DB
한국의 ‘월드컵 1호 골’(19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오른쪽 사진) 주인공인 박창선 전 경희대 감독이 5일 경남 김해시 ‘박창선 축구클럽’ 사무실에서 서너 번의 촬영 시도 끝에 “이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32년 전 세리머니를 재연하고 있다. 김해=박경모 기자 momo@donga.com·동아일보DB
박창선 전 경희대 감독(64)은 난감한 표정으로 무릎부터 꿇었다. 32년 전 한국의 월드컵 1호 골을 기록했을 당시 세리머니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 박 감독은 눈을 감고 세월을 뛰어넘어 기억을 더듬었다. “이거였나요?” 한참 뒤 카메라로 시선을 돌린 박 전 감독의 모습은 왠지 어색함이 가득했다. 울음과 기쁨, 놀라움이 교차하던 그때의 표정이 아니었다.

5일 경남 김해시 ‘박창선 축구클럽’ 사무실에서 만난 박 전 감독은 몇 차례 NG 끝에 어렵게 예전 그 모습을 재현한 뒤 한마디를 던졌다.

“당시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지…. 지금처럼 세리머니를 고민했다면 그렇게 카메라에 잘 잡히지도 않는 곳에서 그랬겠어요?(웃음)”

그런 분위기였다.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올랐던 1954년 스위스 대회에선 한국 선수 그 누구도 골을 넣지 못했다. 이후 32년 만에 다시 올라선 무대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었다. 한국의 첫 상대는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라고 평가받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던 아르헨티나였다. 마라도나는 작은 황소처럼 경기장을 누볐다.

아르헨티나에 두 골을 내주고 전반전을 마무리한 뒤 들어간 라커룸. 당시 주장이었던 박 전 감독은 동료들을 이렇게 다독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마라도나가 있고 (아르헨티나가) 우승 후보라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걸 보여주자!” 그 말이 무색하게 후반전 시작 이후 얼마 안 가 또 골을 먹었다. 스코어는 0-3. 박 전 감독은 속으로 “월드컵이란 이런 무대인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속절없이 무너지지만은 않았다. 후반 28분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골이 터졌다. 월드컵이란 큰 무대가 주는 압박감과 강호 아르헨티나의 무게감을 허무는 통쾌한 중거리 슛이었다. 그 주인공은 전설 차범근도, 신성 김주성도 아니었다. 바로 박 전 감독이었다. 1983년 국내 프로축구 원년 멤버이자 리그에서도 중거리 슛이 일품인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던 그였다. 박 전 감독은 세리머니는 몰라도 골 장면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독수리슛이었죠. 공이 위로 올랐다가 뚝 떨어지면서 들어갔으니 하하.”

이날 박 전 감독의 골을 신호탄으로 한국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불가리아(2차전), 이탈리아(3차전) 등 강호를 상대로 연이어 골(대회 총 4골)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국의 월드컵 골 계보는 시작됐다. 이후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 31번의 골이 한국 축구 팬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 사이 하석주 아주대 감독의 월드컵 첫 선제골(1998 프랑스 월드컵)과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안정환의 16강전 결승 역전골(2002 한일 월드컵) 등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골들이 이어졌다.

“물론 자부심도 있죠. 그 대회 이후 러시아 월드컵까지 계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잖아요. 만약 우리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면 어땠을까요. 비록 1무 2패였지만 아르헨티나든 불가리아든 또 이탈리아든 경기 내용 면에선 우리의 강점인 투지와 조직력 등을 뽐냈고 이를 통해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물려줬다고 생각합니다.”

박 전 감독의 말처럼 멕시코 월드컵은 한국의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업이란 유산을 남겼다. 그 사이 유럽 무대를 누비는 스타플레이어도 탄생했고,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 지원 시스템도 체계화됐다. 멕시코 월드컵 때만 해도 한국 선수단에 해외파는 차범근 단 한 명. 피지컬 트레이너도 없어 감독과 코치 두 명이 코치진의 전부였다. 그 대회 이후 한국은 4년마다 월드컵 본선에 나서면서 발전을 거듭했다는 게 박 전 감독의 생각이다.

박 전 감독은 러시아 월드컵에 나서는 후배들에게 그런 역사를 되뇌어 보라고 당부한다. 1986년에 뿌리내린 월드컵 본선 진출의 경험은 강호들과의 경기를 앞둔 현 대표 선수들에게도 강한 도전의식을 자극할 수 있다. 예전 선배들의 투혼이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요즘도 유효하다는 의미다.

“(1986 멕시코 월드컵 당시) 월드컵 본선도, 세계무대에서 뛰어본 경험도 변변찮던 우리였어요. 지금은 해외파 선수도 많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축적된 한국의 월드컵 본선 무대 경험이 있잖아요. 그동안 월드컵에서 상대한 팀치고 강팀이 아닌 경우가 있었나요. 공은 둥그니깐 자신감 있게 뛰길 바랍니다.”

김해=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1986 멕시코 월드컵#2018 러시아 월드컵#박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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