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월드컵의 성공으로 FIFA의 회원국이 50개 국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32개 나라가 제2회 월드컵 참가신청을 했다. 1932년 FIFA는 이탈리아에게 대회 개최권을 줬다. 당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월드컵을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이 월드컵 참가를 결정했지만 남미는 반대였다. 제1회 대회 때 유럽의 비협조를 잊지 않았던 우루과이는 불참을 선언했다. 이 결정으로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전대회 우승팀이 다음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1회 대회 결승전 상대였던 아르헨티나는 우수한 자국 선수들의 해외유출을 우려해 아마추어 선수 중심으로 파견했다.
FIFA는 처음으로 지역예선을 열어 본선 출전국을 확정했다.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열린 지역예선 경기는 1933년 6월 11일 벌어진 스웨덴-에스토니아 전이었다. 스웨덴이 6-2로 이겨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본선진출을 보장해줬지만 굳이 지역예선 참가를 고집했다. FIFA는 혹시나 개최국이 출전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상대를 약팀으로 골랐다.
이탈리아는 FIFA에 의해 선택받은 그리스를 4-0으로 이겼다. 일방적인 1차전 결과에 화난 그리스가 2차전을 포기해버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도 처음으로 월드컵 지역예선에 참가했다. 아시아 대표는 팔레스타인이었다. 아프리카 대표 이집트와 본선 진출권을 경쟁했다. 이집트가 7-1로 승리하며 아프리카국가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1934년 이탈리아 축구대표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6개국이 참가한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은 1934년 5월 27일부터 6월 10일까지 이탈리아의 8개 도시에서 열렸다. 1라운드 매치업은 이탈리아-미국, 브라질-스페인, 헝가리-이집트, 오스트리아-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네덜란드-스위스, 아르헨티나-스웨덴, 독일-벨기에로 꾸며졌다.
첫 경기에서 진 팀은 짐을 싸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잔인한 경기방식이었다.
무솔리니의 지시에 따라 무조건 우승을 노렸던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 국적의 선수를 훔쳐오다시피 하면서 탄탄한 전력을 꾸렸다. ‘오리운디’로 불리는 이들은 초대대회 준우승의 주역 루이스 몬티, 1928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라이문도 오르시, 아르틸로 디마리아, 엔리케 과이타 등이었다. 다른 나라가 부정선수라고 항의했지만 이탈리아는 “그들이 이탈리아를 위해 죽을 수 있으면 이탈리아를 위해 축구도 할 수 있다”면서 출전을 우겼다.
제2회 대회는 페널티킥 규정이 확립됐다. 제1회 대회는 심판마다 페널티킥의 기준이 달라 많은 문제를 만들었다. 이 기준에 따라 나온 페널티킥을 처음 실패한 선수가 나왔다. 브라질의 바우데마르 지 브리투였다. 스페인과의 16강전에서 페널티킥을 찼으나 스페인의 GK 자모라가 두 손으로 펀칭했다. 결국 스페인이 3-1로 승리하고 8강전에 진출했다.
월드컵 본선에 단 한차례도 빠진 적이 없는 브라질은 수많은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한 경기만 하고 돌아갔다. 조국에 많은 실망을 안겼던 바우데마르 지 브리투는 10여년 뒤 브라질 축구에 사죄했다. 스카우트로 변신해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트라는 어린 선수를 빈민가에서 발굴해냈다. 그 선수는 나중에 펠레라는 애칭으로 브라질을 대표하는 선수가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