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동 월드컵 안된다” 러, 훌리건 외출 막고 도청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0일 03시 00분



러시아 월드컵의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훌리건(폭력 축구팬) 난동 사태가 재발할 것인가.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러시아 당국이 가장 신경 쓰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이 훌리건 대책이다. 러시아에는 주로 극우 성향의 축구팬으로 이루어진 악명 높은 훌리건들이 있다. 이들은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기 때문에 경기장 안팎의 폭력 사태는 물론이고 인종차별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이번 대회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훌리건 대책을 포함한 안전 관리 예산으로만 4700억 원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훌리건들은 월드컵을 앞두고 유튜브에 자신들의 무술 연마 영상을 올리는가 하면 “잉글랜드 팬들을 학살하겠다”는 위협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 훌리건들이 잉글랜드 팬들을 지목한 건 이들이 대대로 악연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훌리건들로 골치를 앓고 있다. 영국 훌리건들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따라다니며 각종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러시아와 영국 훌리건들은 유로 2016 대회 때 대규모 유혈 사태를 일으킨 전례가 있다. 당시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조별리그에서 러시아와 잉글랜드가 맞붙어 1-1로 비겼을 때 두 팀 팬 수백 명이 충돌해 경기장 안팎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프랑스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가스로 진압했다. 프랑스가 극렬 러시아 훌리건들을 붙잡아 징역형을 선고했고 이 사태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외교 문제로도 번졌었다. 이때 잉글랜드 팬 30명이 다치고 2명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중 한 명은 신체 일부가 마비됐다. 목격자들은 “러시아 훌리건들이 글러브와 마우스피스 같은 장비까지 갖추고 왔다”고 진술했다.

“유로 2016 때 당한 것을 갚아줘야 한다”는 훌리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영국 경찰은 최근 훌리건으로 분류된 1312명의 출국을 금지했다. 영국에서는 훌리건들이 국제대회에서 행패를 부릴 경우 5000파운드(약 730만 원) 이상의 벌금이나 징역 6개월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이번 월드컵에는 잉글랜드 팬 1만 명 이상이 모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월드컵에서 “최고의 러시아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훌리건 난동 사태를 막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러시아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애쓰고 있는 푸틴 대통령에게 훌리건 단속은 중요한 일이다. 러시아 훌리건들은 잉글랜드 팬들뿐만 아니라 다른 팀 팬들을 상대로도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러시아는 이미 2017 컨페더레이션스컵을 개최하면서 훌리건 단속 모의고사를 치렀다. 경기장에 악명 높은 훌리건들의 출입을 제한했다.

이번 월드컵에도 러시아 정부는 폭력적인 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경호 인력들은 주기적으로 이 리스트에 있는 훌리건을 찾아 집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자택 감금’을 종용하고 있다. 과거 폭력을 주도했던 훌리건들은 삼엄한 감시는 물론이고 전화 도청에까지 시달리고 있다.

모스크바에서도 수천 명의 경찰과 군인이 추가로 파견되는 등 경기장과 훈련 장소 주변의 순찰이 강화되고 있다. 18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독일-멕시코 경기가 끝난 뒤 경기장 부근 유노스트 호텔 근처에 멕시코 축구팬들이 운집하자 군인들이 호텔을 둘러쌌다. 멕시코 의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주변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패한 독일 팬들과의 싸움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이번 대회에서 러시아는 테러 및 훌리건 사태를 막기 위해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일종의 ‘축구 신분증(팬ID)’ 제도를 만들었다. 경기를 보려면 표를 산 뒤 별도의 팬ID를 발급받아야 한다. 월드컵이 개막한 지금 곳곳에서 이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키트로프 알렉 씨는 “(푸틴) 대통령도 팬ID를 발급받았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신분증만큼 중요한 것이 팬ID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스웨덴전이 열린 18일 경기 장소인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니키틴 호텔에서 만난 스웨덴 팬들은 전세버스가 시동을 건 뒤에도 한참 동안 출발하지 못했다. 일부가 호텔 방에 팬ID를 놓고 왔기 때문이다. 한 스웨덴 팬은 “과거에는 표만 있으면 자유롭게 경기를 볼 수 있었다. 팬ID를 신분증처럼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게 너무나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불편보다는 안전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엄격한 팬ID 제도와 강력한 보안검색을 받아들이고 있다. 경기장에 들어가려면 10분 이상 걸리는 보안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 강력한 조치로 이번 월드컵에서는 훌리건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극우주의자들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러시아 훌리건들은 주로 러시아 프로축구 팬클럽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러시아 당국은 팬클럽 리더들을 만나 수시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와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훌리건 사태는 언제나 의외의 상황과 장소에서 터지곤 했다. 러시아 훌리건들이 영국 훌리건들에 대한 폭력을 예고한 상태에서 19일 잉글랜드가 튀니지와 첫 경기를 치렀다. 이날은 폭력사태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잉글랜드 팬들의 입국이 늘면서 러시아 당국도 신경이 예민해지고 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정윤철 trigger@donga.com / 모스크바=양종구 / 임보미 기자
#러시아 월드컵#훌리건#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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