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제4회 월드컵 본선은 제1회 대회처럼 13개 출전국으로 진행됐다. 6월 24일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인 말라카낭 경기장에서 브라질-멕시코의 개막전이 벌어졌다. 5000마리의 비둘기가 날고 21발의 축포가 터졌다.
브라질은 8만1649명 관중의 기대에 보답하듯 개막전을 2-0 승리로 장식했다. 4만2000명의 관중 앞에서 벌어진 스위스와의 2차전은 2-2 무승부. 화난 브라질 팬들은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브라질은 말라카낭의 14만2049명 관중 앞에서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꺾고 결선 라운드 진출을 확정했다.
2조에선 월드컵 역사상 대이변이 펼쳐졌다. 처음 월드컵에 출전한 축구종가 잉글랜드가 희생양이었다. 6월 25일 칠레와의 첫 경기를 이긴 잉글랜드는 같은 날 스페인에 1-3으로 진 미국을 맞이했다. 모두들 잉글랜드의 승리를 예상했다. 벨루오리존치 미네이랑 경기장에는 1만151명의 관중이 들어왔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첫 경기 뒤 482㎞를 날아온 피로감에 몸이 무거웠지만 전반 15분 동안 5개의 위협적인 슛을 날렸다. 이 가운데 2개는 골대를 맞혔다. 미국 골키퍼 보르기가 슈퍼 세이브로 2골을 막아냈다. 미국은 전반 37분 월터 바의 슛을 가에첸스가 헤딩으로 연결해 골을 만들어냈다. 결승골의 주인공은 아이티 출신으로 콜롬비아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던 유학생이었다.
잉글랜드는 실점 이후 맹공을 퍼부었지만 미국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인 축구 종주국의 패배 뉴스가 런던에 전해졌다. 누구도 결과를 믿지 않았다. 잉글랜드가 10-0으로 이긴 경기의 오타라고 여겼다.
미국인들도 승리소식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 한 곳만이 결과를 보도했다. 미국대표팀이 월드컵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조차도 환영 나온 사람은 없었다. 필라델피아의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으로 대회에 참가했던 월터 바의 아내가 유일한 환영객이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결승골 주인공의 인생이었다. 월드컵 이후 프랑스 등 유럽리그에서 활동했던 가에첸스는 아이티로 돌아갔으나 행방불명됐다. 그의 가족은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반대편에 섰는데 체포당한 이후 누구도 생사를 알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