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야구가 늘어진 엿가락 스포츠가 된 이유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8월 8일 05시 30분


두산 공필성 코치가 사인을 보내는 모습. 스포츠동아DB
두산 공필성 코치가 사인을 보내는 모습. 스포츠동아DB
지금은 롱볼의 시대다. 홈런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도루와 번트, 타자와 주자의 합동공격 같은 디테일한 야구의 설자리가 갈수록 줄어든다. 1920년 라이브볼의 도입과 베이브 루스의 등장으로 새로운 야구의 혁명이 왔지만 초창기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누상에서 주자들이 만드는 다양한 베이스러닝 기술과 이를 막으려는 수비수들의 머리싸움이 야구의 진정한 맛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인사이드베이스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 디테일 야구의 전성시대인 1910년 월드시리즈 승패를 바꾼 첩보전


디테일 야구가 번성했던 1910년 월드시리즈는 이변이었다. 모두가 내셔널리그의 강호 시카고 컵스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쉽게 이길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사람들은 첩보전의 결과라고 했다. 그 시리즈에서 컵스 배터리의 사인이 노출됐다고 모두가 믿었다.

컵스는 1차전에서 4-1, 2차전에서 9-3으로 경기를 내주자 긴급미팅을 했다. 모든 선수들이 참가해 라커룸의 문을 틀어 잠그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상대팀) 코니 맥 감독이 우리 사인을 간파하고 경기를 하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즉시 모든 사인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3차전도 12-5로 대패했다. 결국 컵스는 1승4패로 시리즈를 내줬다. 시리즈 뒤 컵스에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포수 존 클링을 제물로 올렸다. 부주의하게 사인을 상대팀에 노출시켰다며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시켰다. 물론 그 결정이 맞았는지는 어느 누구도 몰랐다.

그 월드시리즈를 지켜봤던 당대 최고의 타자, 타이 콥은 1차전부터 끝까지 컵스 투수들이 무슨 공을 던질지 예측했고 모두 맞았다. 함께 경기를 취재했던 기자의 증언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인 노출의 범인은 포수가 아닌 투수일 가능성도 있었다. 평소 투수들의 습관에서 빼낸 정보를 이용해왔던 콥은 물론 필라델피아 타자들의 예측이 가능했다면 경기의 승패는 뻔했다.

● 큰 경기의 승패를 가름하는 습관과 사인노출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라운드의 첩보전은 야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월드시리즈의 승패가 선수의 습관, 사인노출 등 사소한 것에서 결정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필라델피아가 뉴욕 자이언츠를 누른 1911년 월드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뉴욕은 크리스티 매튜슨, 루브 마콰드라는 강력한 원투펀치를 보유했지만 필라델피아 프랭크 베이커의 홈런에 무너졌다. 2,3차전 중요한 순간에 홈런을 때린 베이커는 월드시리즈 이후 홈런 베이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베이브 루스 이전 시대 최고의 홈런타자에게 붙었던 영광스런 별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사람들은 필라델피아의 우승 이유가 궁금했다. 이번에도 자이언츠의 사인이 노출됐다고 했다. 놀랍게도 사인을 훔친 범인은 선수가 아닌 배트보이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필라델피아의 베트 보이(루이스 반 젤스트)가 사인을 훔쳐 전달했다는 것이다. 유니폼을 입은 배트보이가 어린 소년이었기에 그라운드의 누구도 경계하지 않은 가운데 자이언츠 포수 치프 메이어스의 사인을 훔쳐 3루 코치에게 전달했다고 기사는 주장했다. 물론 피해 당사자인 자이언츠의 크리스티 매튜슨은 반박했다. “필라델피아 원정을 앞두고 경기장 여기저기를 사전에 점검했다. 정보노출을 우려해 다양한 방어책을 썼다. 우리 포수는 계속 가짜 사인을 냈다”면서 배트보이 관련 소문을 일축했다. 매튜슨은 “필라델피아가 우리 사인을 알고 있는 것처럼 꾸며서 자이언츠 선수들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전을 썼을 수도 있다”는 분석을 했다.

● 야구 경기시간이 한여름 엿가락처럼 늘어난 계기는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1910년대 야구는 상대의 사인을 훔치고 정보를 알아내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는 때였다. 그러다보니 경기시간이 차츰 길어졌다. 요즘 우리 프로야구와 비슷했다. 1,3루 코치석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포수들은 가짜 사인을 섞어가며 정교한 사인을 내야 했다. 당연히 사인이 많아졌다. 그 결과 평소 한 시간 30분이면 충분했던 경기시간이 훌쩍 2시간을 넘어섰다. 경기시간 지연의 주범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사인교환과 투수의 나쁜 컨트롤이라는 것이 수많은 경기를 통해 이미 확인됐다.

1913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프랭크 내빈 구단주는 이런 상황이 불만족스러웠다. 아메리칸리그 회장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경기를 빨리 끝내기 위해 1,3루 코치석을 기존의 룰보다 훨씬 뒤인 외야로 물리자는 제안이었다. 상대의 사인을 못 보게 하면 자연스럽게 경기가 빨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내빈의 주장은 스피드업을 위해 전통의 고의4구를 대신해 자동 고의4구를 용감하게 도입한 2018년의 KBO리그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 회장 바이론 밴크로프트 존슨은 “그것도 야구”라면서 한마디로 거부했다. 오늘날 야구경기의 시간이 한여름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은 밴 존슨의 그 판단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존슨이 3시간을 훌쩍 넘어 간혹 4시간 동안 경기를 하는 지금의 KBO리그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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