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됐다. 2004년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른 보스턴은 2007년과 2013년에 이어 올해까지 우승을 차지해 21세기 최다 우승팀 반열에 올랐다.
밤비노의 저주란 1920년 전설적인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를 숙적인 뉴욕 양키스로 헐값에 트레이드한 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해 루스의 애칭인 밤비노(‘아기’라는 뜻의 베이브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를 붙여 만든 징크스를 말한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 소속 8개 팀 가운데 하나로 창단된 보스턴 레드삭스는 1903년 전설적 투수 사이 영을 앞세워 월드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한 후 1912, 1915, 1916, 1918년까지 다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명문 구단이었다. 하지만 루스를 영입한 뉴욕 양키스가 1923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 최다 우승 기록(2009년까지 27회)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며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그러다 저주의 사슬이 풀리면서 21세기 최고 명문 구단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 보스턴의 팀 명칭에 ‘원조’에 대한 집착 내지 오마주(경의)가 담겼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야구, 미국보다 오래된 역사
미국인에게 야구는 신화다. 남북전쟁 때 북군의 첫 포격 명령을 내린 애브너 더블데이(1819~1893)가 1839년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구슬치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에게 야구 규칙을 알려주고 두 팀으로 나눠 시합을 하게 한 것이 시초라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그래서 야구 명예의 전당이 쿠퍼스타운에 지어졌지만 사실 야구 역사는 미국보다 더 오래됐다.
공과 방망이를 들고 하는 야구의 기원을 추적하다 보면 1301년 프랑스 문헌인 ‘기스텔레스 시간달력’에 수록된 ‘플랑드르 경기’의 그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각종 구기 종목의 기원을 추적한 ‘더 볼’에 따르면 1450년 영국에서 생겨난 ‘스툴볼’이 미국 야구와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크리켓의 공통조상으로 꼽힌다. 아이들이 공에 맞거나 아웃되지 않으려 애쓰며 빙 둘러 놓인 나무 걸상(스툴)을 돌면서 달리는 놀이였다. 야구(base-ball)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 역시 1744년 영국 동화작가 존 뉴베리가 쓴 ‘작고 예쁜 포켓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아는 야구의 원형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변화가 없다. 놀랍게도 그 원형 가운데 상당수는 프로야구 구단의 창단 이후 이뤄졌다. 공, 방망이와 함께 야구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는 글러브의 도입과 1루에 한해 오버런을 허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프로야구 구단 창단은 프로야구리그보다 앞섰다. 내셔널리그는 1876년, 아메리칸리그는 1901년 창설되는데, 최초 프로야구팀은 그보다 훨씬 앞선 1869년 창단됐다. 1866년 아마추어 클럽으로 창단됐다 다른 클럽의 우수 선수를 돈 주고 스카우트하고 소속 선수들과 전속계약을 체결해 전업 야구팀을 선언한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다.
태초에 빨간 양말이 있었다
레드스타킹스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마추어팀과 시합을 펼쳤는데 프로 선언 첫해인 1869년엔 67전 67승 전승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이 연승 기록은 그다음 해까지 81연승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1869년 한 해에 20만 관중을 끌어모으는 선풍적 인기를 누렸고 다른 프로야구팀 창단을 가속화했다.
이 팀은 오늘날 야구 유니폼의 전형이 되는 패션을 선보이는데, 무릎 아래까지만 조이는 바지 니커스 아래 빨간색 긴 양말을 신어 ‘레드스타킹스’로 불리게 된다. 그 패션도 인기를 끌면서 1870년 창단된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시카고 컵스의 전신)의 팀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치솟는 선수들의 몸값을 감당하지 못해 1870년 결국 해체된다. 그러자 1871년 감독 겸 중견수였던 해리 라이트와 그의 동생이자 간판 강타자였던 조지 라이트 등 핵심 선수 4명을 스카우트하고 팀명까지 가져간 보스턴 레드스타킹스가 창단된다. 이 팀 역시 최초의 프로야구리그로 꼽히는 미국프로야구선수협회(NAPBP)의 5년 역사에서 4번 우승하며 ‘야구=레드스타킹스’의 명성을 이어갔다.
그러다 1876년 내셔널리그가 출범하면서 새로 창단된 신시내티 레즈와 구별하고자 레드스타킹스 외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1912년부터 브레이브스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1953년 중부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겼다가 다시 1966년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옮겨 현재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됐다.
한편 1901년 아메리칸리그가 출범하면서 그 소속팀으로 출발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본디 공식 팀명이 없었다. 그러다 1907년 내셔널리그의 보스턴 팀(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신)이 유니폼을 흰색으로 변경하자 아메리칸리그 보스턴은 1908년부터 유니폼 앞면에 빨간색 양말 로고를 달고 나온다. 원조의 전통을 은근슬쩍 가로채기한 셈이다.
내셔널리그의 보스턴이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빨간색 유니폼으로 회귀했지만 레드삭스라는 팀명은 아메리칸리그 보스턴의 것으로 굳어졌고, 원조 보스턴 레드스타킹스는 결국 새 둥지를 찾아 떠나게 된 것이다.
스타킹스(Stockings)가 삭스(Sox)로 바뀐 것은 철자가 길면 신문에서 제목을 뽑을 때 지면을 많이 잡아먹는다고 해 1901년 아메리칸리그의 시카고 팀 이름을 화이트스타킹스가 아닌 화이트삭스로 삼은 게 전환점이 됐다. 레드스타킹스에서 화이트스타킹스가 나오고, 다시 화이트삭스에서 레드삭스가 나온 것이다.
한편 신시내티에선 원조의 전통을 앞세워 레즈, 레드스타킹스, 레드레그스 같은 팀명이 명멸하다 1959년부터 신시내티 레즈로 굳어졌다. 레즈는 자신들이 원조의 적자라고 주장하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원조의 붉은 피가 흐른다고 주장하는 팀이 신시내티 레즈,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 3팀이나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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