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정신력 싸움이기도 하다. 전력 투구하는 투수의 손끝, 공을 맞히는 순간 타자의 방망이, 타구를 향해 몸을 날리는 야수의 글러브까지. 모든 플레이에는 객관적인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기세가 작용한다. 게다가 그 경기가 단기전이라면, 한 시즌 농사를 결정짓는 무대라면 더욱 그렇다.
1승 1패로 팽팽히 맞선 두산과 SK의 한국시리즈. 양 팀 주장인 두 명의 ‘재원’은 정상의 문턱에서 앞장 서서 팀을 이끌어야 될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다. 선수들의 손끝, 발끝에서 불안감을 덜어내고 사기를 돋워야 할 SK 이재원(포수)과 두산 오재원(2루수)의 남다른 결의를 들어본다.
●“SK는 두산에, 나는 (양)의지에게 도전자 입장이다. 편하게 도전하겠다.”(이재원)
도전자의 논리는 단순하다. 최선을 다해 이기면 좋고, 져도 후회는 없다는 것이다. ‘도전자 모드’에서는 ‘지면 어떡하지’하는 걱정보다는 ‘하는 데까지 해보자’하는 투지가 남는다. 이재원은 자신과 팀을 도전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강팀을 대적하는 부담을 덜었다. 리그 최강의 포수이자 입단 동기인 양의지를 맞서는 이재원의 마음과 올 시즌 ‘절대 1강’ 두산에 맞서는 SK의 선수단의 마음은 서로 통한다. 그는 1차전 승리 후 “부담은 우리보다 두산이 더 많을 것이다. 도전하는 팀은 긴장이 덜하다. 쉽게 지지 않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차라리 잘 졌다.”(오재원)
오재원은 예상치 못한 1차전 패배에 영리하게 대처했다. 패배의 충격을 떨치고 선수들을 다독여 내일을 준비해야 할 임무가 그에게 맡겨졌다. 그는 패배의 이유를 찾기보다 ‘쿨’하게 인정하는 방법을 택했다. 패배가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경기 감각을 제대로 찾지 못한 1차전 ‘두산답지 않은’ 모습으로 패배의 쓴맛을 봤던 선수들은 오재원의 뼈있는 농담 한 마디에 이내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며 2차전 승리를 거둬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농담의 당사자인 두산 김태형 감독은 표정 관리가 어려웠을 듯하다. 2차전 승리 후 그는 “감독 입장에서는 비수가 꽂힌 말이었다”며 웃었다.
●“부러지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이재원)
플레이오프 4차전 주루 과정에서 이재원은 뒤꿈치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베이스를 밟는 순간 체중이 실리면서 뼈에 멍이 들었다. 골절은 아니었지만 주루에 어려움을 느껴 5차전에선 대타로만 나섰다. 파울 타구도 여러 차례 맞았다. 한국시리즈 1차전 7회 두산 오재일의 파울 타구를 맞은 뒤에는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맞은 데만 다시 맞는 것 같다”며 웃어넘겼다. 주장으로서, 또 주전 포수로서 완전하지 않은 몸으로 헌신하는 모습은 많은 선수들의 귀감이 됐다. SK 힐만 감독은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본인이 경기에 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렇게 아픈데도 타석에서 스윙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웠다”며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
●“즐겁게 하자. 즐겁게 하면 이긴다”(오재원)
올 시즌 오재원이 두산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즐기자”였다. 강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부담감이다. 선수들은 ‘내가 잘해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하지만 과한 책임감은 독이 된다. 7차례 한국시리즈와 아시아경기·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 경험으로 큰 경기를 수없이 겪어본 오재원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규시즌 1위가 확정된 뒤 그는 “하나도 안 즐거울 때도 많다. 하지만 즐겨야 한다. 즐기면 성적이 따라온다”고 말했다. 지금 두산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다. 당연히 우승해야 한다는 기대 속에 두산 선수들은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 2차전 승리로 몸이 풀린 선수들은 앞으로 “하나도 안 즐겁더라도 즐겨야” 남은 경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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