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남지현 씨(27)는 24일 열리는 영남알프스(울산) 하이트레일 40km와 다음 달 1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스파르탄레이스 20km를 달린다는 생각에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다. 회사원 최홍석 씨(40)와 예비역 하사 허곽청신 씨(24), 해병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준비하고 있는 유동현 씨(21)는 25일 개막하는 남극마라톤에서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에 도전한다. 산과 모래사막, 물이 흐르는 계곡, 눈이 내리는 초원 등을 달리는 트레일러닝에 빠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왜 사막과 산을 뛰어다니고 싶어 할까.
2000년대 초반부터 사막과 산악 등 오지를 달려온 국내 트레일러닝의 선구자 유지성 런엑스런 대표(47)는 “도심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자연의 참맛을 체험하고 싶어서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연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몇 시간씩 달리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도로를 달리는 것과는 천지 차이의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트레일러닝은 산과 들, 사막 등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거나 걷는 운동으로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을 두고 있다. 과거 산악마라톤과 사막마라톤이 따로 불렸는데 모두 트레일러닝 범주에 포함이 됐다. 유 대표는 “2012년 국제트레일러닝협회가 생기면서 중구난방 열리던 대회를 트레일러닝으로 통합했다. 대회 이름은 다양하지만 개념은 모두 트레일러닝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2016년 건강을 다지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남 씨는 지인의 권유로 트레일러닝에 빠지게 됐다. “이제 막 10km를 완주할 정도였는데 50km의 산길을 달리자고 했다. 너무 재미있다고. 처음엔 망설였다. 장거리라 부담이 됐다. ‘출발하면 어떻게든 달린다’고 해 그해 여름 DMZ 울트라트레일러닝 50km에 신청했고 진짜 완주했다.” 7시간 20분. 첫 완주 치고는 좋은 기록이었다. 남 씨는 “힘들 줄 알았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달리다 힘들면 걷는다. 오르막은 주로 걷는다. 본래 겁이 없는 성격이었는데 내리막길을 달리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혹 다칠까 봐 내리막을 천천히 달리는데 난 빠르게 질주하며 산을 내려간다”고 말했다. 남 씨는 지난해 경기 동두천에서 열린 코리아 50km 트레일러닝에 출전해 완주하는 등 지금까지 크고 작은 대회를 20회나 완주했다. 지난해는 대만에서 3일간 열린 134km 슈퍼레이스에 출전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남 씨는 말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산을 달리면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삶의 활력소가 된다. 일도 더 잘된다. 그리고 대회 참가를 신청하고 스케줄을 짜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이 재밌다. 몸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부상 위험도 있고 힘이 든다. 탄탄한 준비로 완주하면 기쁨이 두 배다.”
트레일러닝은 젊은 사람들이 달린다. 유 대표는 “트레일러닝 참가자의 95%가 20대에서 40대”라고 말했다. 회사를 다니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젊은 남녀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달리며 대회에도 출전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크루(Crew) 문화다. 과거 몇십, 몇백 명이 모이는 동호회나 클럽의 개념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크루가 있다. 남 씨가 속한 크루도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남 씨는 “보통 스포츠용품 업체가 지원하는 크루가 있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든 크루가 있다. 스포츠용품 업체가 지원하면 기록을 강조한다. 자신들의 브랜드를 신고 기록이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일반 크루는 동호회처럼 활동한다. 그렇다고 동호회처럼 우르르 뭉쳐 다니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크루는 자신들의 존재를 과감히 드러내고 자부심을 갖는다. 티셔츠를 하나 맞추더라도 최신 유행을 반영해 멋지게 만든다. 기록도 중요하지 않다. 크루에서 기록을 따지면 ‘꼰대’로 불리며 ‘왕따’가 된다. 짧은 순간이지만 자연과 하나 되는 자신이 중요하다.
유 대표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50여 개의 트레일러닝 대회가 있다. 많게는 1500여 명, 적게는 수십 명이 달린다. 트레일러닝은 산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등산객들과의 마찰 등을 고려해 참가 인원을 제한한다. (사)달리는의사들이 18일 주최하는 소아암돕기 행복트레일런축제도 선착순 500명으로 제한했다. 서울 대모산과 청계산, 인릉산 등을 달리기 때문에 등산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트레일러닝 국내 인구는 1만 명 정도다.
수도권에는 달리기 좋은 산이 많다. 도봉산 창포원에서 출발해 태릉에 이르는 코스와 일자산, 대모산, 관악산 등.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은 트레일러닝 고수들이 좋아하는 ‘강북 5산 종주’ 코스다. 다소 난도가 높아 초보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트레일러닝 참가는 국내외가 따로 없다. 이미 아시아 지역 트레일러닝에 참가한 남 씨는 울트라트레일몽블랑(UTMB)에 도전할 계획이다. UTMB는 트레일러닝 대회 가운데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 170km(UTMB), 101km(CCC), 119km(TDS), 290km(PTL), 55km(OCC) 등 5개 종목이 열린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일러닝 대회가 많다. 해외로 갈 경우 경비가 보통 600만∼700만 원(항공, 숙박, 특수장비 구입 포함) 든다. 남극은 2000만 원이 넘는다. 그래도 트레일러닝에 빠진 사람들은 해외의 산과 사막으로 향한다.
‘극지(極地)’인 사막을 달리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을 2차례 한 유 대표는 사막마라톤을 트레일러닝의 ‘끝판왕’이라고 부른다. 모래와 산, 물, 눈 등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며 달릴 수 있다. 사막마라톤은 6박 7일간 250km를 질주하는 스테이지 레이스다. 식량과 침낭 등 7일간 필요한 것을 가방에 넣어 짊어지고 달린다.
사하라(나미비아·과거 이집트)와 고비(몽골·과거 중국), 아타카마(칠레), 남극마라톤 등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에 도전하는 최홍석 씨는 “여러 스포츠를 즐기다 도로 마라톤에 지쳐 있을 때 사막마라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 씨는 지난해 사하라와 고비사막을 다녀왔다. 그런데 과거 기간에 상관없이 4개 마라톤을 완주하면 됐던 그랜드슬램이 1년에 다 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어 올 4월 사하라, 8월 고비를 다시 다녀온 뒤 9월 아타카마까지 완주했다. 특히 최 씨는 아타카마에서 허곽청신 씨, 유동현 씨와 팀을 이뤄 사상 처음 팀레이스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사하라와 고비에서 만나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팀레이스가 있어 함께 나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둘 다 흔쾌히 수락해 달렸는데 1등을 했다. 팀레이스는 함께 레이스를 펼쳐 동시에 들어와야 한다. 좀 빠르다고 먼저 가면 팀레이스가 안 된다.” 최 씨는 아타카마사막이 가장 좋았다. 그는 “사하라, 고비와는 다른 풍경이 있었다. 달의 계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흡사 우주에 온 듯했다. 달이나 화성의 지형과 닮았다. 눈처럼 하얗게 덮인 소금 결정체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해군 특수전전단(UDT) 출신 허곽 씨는 “사막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때 사막마라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간적인 면이나 나의 몸 상태를 봤을 때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UDT 특수임무대대 소속으로 2015년과 2017년 소말리아 호송전대 청해부대 파견까지 다녀왔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그랜드슬램을 준비했다. 부대에서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체력을 끌어올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원광대 경찰행정학과 복학을 앞둔 그는 장기 프로젝트도 만들었다. 사막에서 만난 해외 친구들이 ‘이곳은 꼭 가봐야 한다’는 대회를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로 아마존(브라질)과 그랜드캐니언(미국) 트레일러닝이다.
유동현 씨는 “군대 있을 때 우연히 잡지를 보고 사막마라톤을 접했다. 그 순간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에서 허락을 받고 시작했다. 하루 4, 5시간 운동했다. 체육시간 외에 자유시간에도 운동을 했다. 그래서 4월 사하라를 완주했고 7월 전역한 뒤 고비와 아타카마를 다녀왔다”고 말했다. 한양대 전기공학과 복학 예정인 그는 “처음 보는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전 세계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랜드슬램을 하면 세계 최연소가 된다. 지금까지는 만 22세였다”며 말했다. 그는 사막을 달리며 세계의 여러 사람을 만나 성장했다고 했다. 그래서 사막을 달리듯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일찌감치 ‘인생 목표’도 설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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