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 내내 누워 있던 중학생 손자가 즐거운 만남을 끝내고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 할머니 진순영(가명·70)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했다. 기쁘고 슬퍼서 또 미안하고 고마워서….
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온 세상을 가득 채웠던 12월 21일. 올해에도 어김없이 ‘키다리 산타’가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서울아산병원 146병동 소아혈액종양과를 찾아왔다. 병마와 열심히 싸우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힘이 되고, 기회가 닿는 한 매년 연말 이곳(서울아산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뜻 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큰 키(197.5㎝) 만큼이나 풍성한 마음씨의 김신욱(30·전북 현대)은 직접 차를 몰고 먼 길을 달렸다. 전주에서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 동쪽 끝자락의 병원으로 향했다.
K리그1 챔피언 전북 선수단은 내년 1월 4일 전북 완주군의 클럽하우스에서 2019시즌을 위한 첫 훈련에 나서지만 김신욱은 일찌감치 전주에서 개인훈련에 전념하며 부지런히 몸을 만들고 있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병원에서 김신욱은 김태진(가명·14) 군과 마주했다. 예년에는 일정액 성금을 기부한 뒤 병동 전체를 돌며 아이들과 두루두루 만남을 가졌지만 올해부터 방식을 살짝 바꿨다. 누군가와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중증재생불량성 빈혈로 5년째 고통을 받는 태진군과 김신욱은 구면이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던 지난해 12월 18일에도 둘은 대면한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따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는데, 1년여 만에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됐다.
“최근에 축구를 잘 안 봤다”는 태진이는 어릴 적 축구선수를 꿈꿨다. 누구보다 공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지러움으로 누워있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차츰 멀리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집이 있는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입원 및 통원치료를 받은 것은 2017년 6월부터다. “축구가 너무 좋았는데 못하게 되다보니 조금씩 멀리 하게 됐다.”
이제 태진이의 장래희망은 축구선수가 아닌, 의사로 바뀌었다.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주고, 완치되면 보람을 느끼는 삶을 사는 의료인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했기 때문이다. 앉아있고 일어서는 평범한 활동이 어렵다보니 적극적으로 공부를 할 수는 없지만 틈날 때마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고 지식을 채운다.
김신욱은 중학교 시절, 발목을 크게 다치며 하마터면 초록 그라운드에 서지 못할 뻔한 이야기, 보다 좋은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다양한 변수로 목표를 바꿔야 했던 순간, 단조로운 삶 속에서 동기부여를 좀처럼 찾기 어렵고 축구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하나씩 털어놓으며 한층 태진이와 가까워졌다.
이 자리에서 김신욱은 ‘희망’과 ‘긍정’이란 단어를 여러 번 언급했다. “몸이 아닌 마음으로 싸우자.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버티고 이겨내자. 마음만큼은 항상 쉬지 않았으면 한다”는 진심 어린 메시지에 태진이도 싱긋 웃으며 마음을 열었다.
못된 병마와 태진이의 기약 없는 싸움은 당분간 계속된다. 이미 두 번이나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았지만 한 번 더 이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의료진의 설명. 그래도 충분히 완쾌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다행스럽다.
“몸이 다 나으면 학교에 가고 싶고, 할머니와 제주도에 놀러가고 싶다”는 태진이의 작은 바람을 접한 김신욱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제주도 여행경비를 제공함은 물론이고, 자신도 가능하다면 꼭 동행하겠다는 약속. 누군가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여행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간절한 법이다.
태진이는 날이 궂으나 맑으나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할머니가 고맙다. “(내게 할머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분”이라며 수줍게 감사함을 전했다. 진 씨는 “아픈 손자가 완쾌돼 품에 안기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면서 곧 다가올 감동의 내일을 기대한다.
“내년에는 이곳(병원)이 아닌, 제주도로 향하는 공항에서 즐겁게 만나자”는 모두의 약속이 이뤄질 수 있을까. 모두의 뜨거운 응원이 필요한 따스한 2018년의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