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37년간 숱한 타자들이 뜨고 졌다. 이들 중 2000안타 고지를 밟은 이는 단 11명뿐이다. 11명 중 2018시즌까지 현역으로 활약한 선수는 박용택(LG 트윈스), 정성훈(KIA 타이거즈), 박한이(삼성 라이온즈), 이진영(KT 위즈), 김태균(한화 이글스) 다섯 명이다. 리그에 손꼽힐 만한 대기록을 달성한 현역 선수가 많다는 것은 KBO리그의 큰 자산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물론 역대 2000안타를 넘어선 이들 모두 그라운드를 떠나는 과정이 썩 매끄럽지 못했다.
● 현역 2000안타 타자들에게 유독 추운 겨울
올 겨울은 2000안타 현역 타자 다섯 명에게 유독 차갑다. 풍족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선 정성훈과 이진영은 나란히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LG에서 방출된 정성훈은 올 시즌을 앞두고 고향팀 KIA의 부름을 받아 현역을 연장했다. 백업 요원으로 분류됐지만 88경기에서 타율 0.295(183타수 54안타)로 쏠쏠히 활약했다. 비록 후반기 부진했지만 전반기 57경기에서는 타율 0.344로 여전히 최고 수준의 타격을 보였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KIA로부터 ‘플레잉 코치’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현역 은퇴를 선택했다. 코치역할만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진영은 2016시즌 종료 후 2년의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맺었다. 내년부터는 연봉협상을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올 시즌 110경기에서 타율 0.318을 기록하며 여전한 경쟁력을 과시했지만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됐다. 타 팀의 러브콜이 있을 법했지만 KT 소속으로 유니폼을 벗겠다는 각오가 확고했다. 이진영은 제2의 야구인생을 두고 다각도로 고민 중이다.
박용택은 올 시즌 159안타를 추가하며 2384안타로 양준혁(2318안타)을 넘어 통산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로 등극했다. 시즌 종료 후 세 번째 FA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는 앞선 두 번의 FA 때보다 더욱 찬바람이 불고 있다. 양 측 모두 ‘잔류’라는 대전제를 두고 있어 서두를 것이 없다지만, 아직 양측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낸 박용택도 리그 전반에 불어오는 리빌딩 바람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꾸준함의 아이콘’ 박한이는 세 번째 FA 자격을 포기했다. 앞선 두 번의 FA 계약에서 유달리 저가에 계약하며 ‘착한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올해도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온전히 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김태균은 와신상담 중이다. 한화가 11년만의 가을야구라는 경사를 누렸지만 정작 73경기 출장에 그치며 기여도가 낮았다고 자평하고 있다. 라커룸에서는 여전한 리더 역할을 해냈지만 여러 차례 잔부상에 시달리며 시즌 내내 고전했다.
● 영예로운 퇴장은 ‘승짱’뿐
이미 유니폼을 벗었던 2000안타 타자들의 마무리 역시 대부분 매끄럽지 못했다. 박용택에게 통산 최다안타타이틀을 물려준 양준혁도 그랬다. 2009시즌부터 출장수가 급격히 줄었다. 그럼에도 두 자릿수 홈런에 OPS(출루율+장타율) 0.990으로 펄펄 날았지만 2010년에는 기회가 더욱 줄었다.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과 연이은 잡음이 새어나왔다. 영예로운 은퇴식에 영구결번 처리까지 됐지만 마무리는 분명 아쉬웠다.
‘스나이퍼’ 장성호는 해태 타이거즈와 KIA를 거치며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타율 3할은 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후 한화~롯데 자이언츠~KT로 연이어 이적하며 선수 생활 말년에는 원치 않는 ‘저니맨 이미지’까지 얻었다. 홍성흔 역시 은퇴 시즌 최악의 부진에 시달리며 팀이 우승하는 데 기여도가 높지 않았다. 2018안타(통산 11위), 550도루(1위)의 ‘대도’ 전준호도 시즌 후 방출통보를 받으며 타의로 유니폼을 벗었다.
2156안타로 통산 4위에 오른 ‘국민타자’ 이승엽이 사실상 유일한 예외다. 이승엽은 2015시즌 종료 후 2년의 FA 계약을 맺었고, 만료 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은퇴 시즌에는 KBO리그 최초로 은퇴 투어까지 치렀다. 국민타자에 걸맞은 퇴장이었지만, 그 영광은 이승엽만이 누렸다.
단지 2000안타를 제쳐두더라도 37년 리그 전체에 11명뿐인 타자는 그 자체로 역사이자 자산이다. 아직 2000안타를 넘기지 못한 현역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는 김주찬(KIA·1780안타)으로 220개나 부족하다. 2년은 꾸준히 뛰어야 2000안타 고지를 넘어선다. 과거를 이유로 미래 가치를 높게 매길 필요는 없지만, 이들이 초라하게 그라운드를 떠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베테랑이, 역사가 가진 가치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