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원로 박경화 씨(81)는 6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개막하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한국의 우승이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토트넘), 기성용(뉴캐슬) 등 해외파가 가세하면 우승 전력 아니냐고 재차 묻자 “해외파 선수들은 외국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국내파들이 (이에 걸맞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은 1956년 1회, 1960년 2회 아시안컵에서 연속 우승한 뒤 2015년 대회까지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80년 7회 대회 결승에서 이란에 0-1, 1988년 9회 대회에선 사우디아라비아에 승부차기 3-4로 각각 졌다. 2015년 16회 대회 결승에서도 호주에 1-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박 씨는 1960년 대회 우승 멤버다. 당시 연세대 2학년으로 공격수(윙)로 뛰며 결승에서 이스라엘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길수 한국OB축구회 회장(75)은 “박 선배는 선수 시절 발 기술이 뛰어나고 주력도 빨랐다”고 회상했다. 아쉽게도 대표팀 선수 대부분이 별세했고 박 씨와 이은성 씨(84)만 생존해있다.
2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축구회관에서 만난 이 원로 축구인은 왜 한국 축구의 미래를 밝지 않다고 봤을까. 박 씨는 이에 대해 “1960년 이후 한국 축구가 아시안컵에서 우승하지 못한 건 선수들이 축구의 기본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가능성 있는 신인을 키워내는 지도자도 부족했다. 원석(原石)을 돌로 남길지 다이아몬드로 만들지는 지도자에게 달려있는데 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선수들이 체력은 좋아졌지만 창조적인 기술과 전술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최근 일본 축구가 기본기를 강조하면서 한국보다 더 강해진 것도 기본기의 차이”라고도 했다.
박 씨는 축구의 3대 요소를 지켜야 어느 팀에서든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라운드 주위를 빠르게 살피고 △패스를 하자마자 뛰고 △볼을 기다리지 말고 따라가 잡으라”는 지적이다.
박 씨는 요즘도 축구 경기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후배들에게 자신이 쓴 책을 나눠주고 “공부하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외국에서 원활한 대화를 하기 위해 영어 단어 1만2000자를 외웠고 아랍어까지 배웠다”며 “축구 관련 서적도 50권 넘게 썼다. ‘축구의 ABC’는 톰 바이어의 책을 직접 번역해 스트레칭부터 패스, 슈팅, 양발의 코디네이션, 식사법까지 담았다. 축구선수는 이런 지식을 알고 있어야 자신의 실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며 공부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박 씨의 축구 인생은 8세 때 시작됐다. 배재고, 연세대 시절 청소년 대표와 국가 대표를 지내며 아시아청소년대회 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도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70년대 청소년,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고, 1986년 아시아주니어대표팀, 1990년 베이징올림픽 여자대표팀 사령탑을 지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축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는 집에 ‘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留皮 人死留名·표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글귀를 붙여놓았다고 소개했다. 그 이유에 대해 “팔십 평생 축구에 헌신한 내 이름 석자만 남기면 만족한다. 후배 축구인들도 자신의 이름이 축구사에 남을 수 있도록 열심히 뛰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올해 아시안컵은 24개국이 출전해 6개조에서 조별리그를 치른다. 59년 만에 우승을 노리는 한국은 C조에 편성돼 필리핀(7일) 키르기스스탄(12일) 중국(16일)과 맞붙는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이란 호주가 우승 후보로 꼽힌다. 박 씨는 한국의 아시안컵 우승 가능성을 반신반의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한국이 8강에 오른다면 자비로 UAE에 날아가 대표팀을 응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곤 작은 주머니에서 노랗게 빛나는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1960년 아시안컵 우승 금메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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