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심석희(22)가 상습적 성폭행 혐의로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를 추가 고소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체육계가 발칵 뒤집혔다. 무엇보다 대한체육회가 8일 2010년과 비교해 폭력(51.6%)과 성폭력(26.6%)이 각 25.5%포인트, 23.9%포인트 줄어들었다는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 지 6시간여만에 공개된 사건이라 그만큼 충격이 크다. 음지에선 여전히 많은 선수들이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제2차관도 9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그간 정부와 체육계가 마련해왔던 모든 대책들이 사실상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책임을 통감했다. ● 과거 사례도 있는데, 왜 반복될까
2007년 한국여자프로농구연맹(WKBL)에서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박명수 전 우리은행 감독은 전지훈련지인 미국 LA에서 선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권위를 악용해 악질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에 정통한 관계자는 “당시 선수들은 박 전 감독과 직접 연봉협상을 했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절대적인 ‘갑’의 위치였고, 선수들은 억울한 부분이 있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직장갑질’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벌어진 뒤에도 체육계에선 여러 차례 성폭력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집행유예와 영구제명이라는 과거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불감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조 전 코치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 심석희 측 법무법인 세종은 “지도자가 상하관계에 따른 위력을 이용하여 폭행과 협박을 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왜 노출될 수밖에 없나
냉정히 말해 여자선수들은 늘 성폭행 및 추행의 위험에 노출돼있다. 종목에 관계없이 합숙 생활을 하는 선수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유교 사상이 바탕이 되는 대한민국 문화의 특성상, 상사의 지시를 거스르긴 쉽지 않다. 특히 해외 전지훈련을 떠나면, 선수가 위험에 노출될 확률은 더 올라간다. 경기 출전 여부는 진학, 취업, 연봉 등과 직결된다. 선수 기용은 지도자의 고유 권한이다.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선수는 철저히 배제한다. 이 같은 분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도자의 요구를 거부하는 선수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각지대에서 (성)폭행 또는 추행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미래가 걸려있다 보니 피해를 입고도 쉽게 사실을 알릴 수 없는 구조다. 동료들이 힘을 모아 돕지 않는다면, ‘내부고발자’로 찍혀 모든 상처를 혼자 뒤집어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운동에 인생을 바친 선수들의 절실함을 악용한 범죄로 죄질이 상당히 나쁘다.
● 솜방망이 처벌, 대책은 있나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은 무겁지 않다. ‘권력형 성폭행’의 법정최고형은 징역 10년이다. 기존 5년에서 지난해 3월 상향조정됐다. 공소시효는 10년이다(기존 7년). 피해자는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솜방망이에 가까운 처벌수위다. 조 전 코치도 지난해 1월 심석희를 상습 폭행한 사실이 알려져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뒤 곧바로 중국 대표팀 지도자로 합류하려 했다. 가해자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 구조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중은 분노했다. 노 차관이 브리핑에서 “(성폭행) 가해자의 혐의가 확정되면 대한체육회는 물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해당 종목의 국제연맹에 통보해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가해자의 해외 활동까지 제한하도록 하겠다”고 부랴부랴 대책을 발표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 체육인은 “철저히 무관용 원칙으로 다스려야 조심하게 될 것이다. 법의 힘을 빌려야만 문제를 뿌리뽑을 수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전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가 선수들을 상대로 성폭행 및 성추행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돼 175년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참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