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싸움이 화끈한 가운데 여자부 신인왕싸움은 더 뜨겁다. 이주아(흥국생명) 박은진(KGC인삼공사) 정지윤(현대건설)의 경쟁이 치열하다. 공교롭게도 3명 모두 소속 팀에서 미들블로커다. 같은 포지션의 경쟁이라 우열이 쉽게 드러날 만도 한데 각자의 장점이 있어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다른 시즌이었다면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2007~2008시즌 이후 가장 신인풍년의 해에 입단한 탓에 이들은 생애 한 번의 기회뿐인 상을 놓고 시즌 끝까지 경쟁해야 한다. 참고로 역대급 신인왕 다툼이 벌어졌던 2007~2008시즌은 배유나(GS칼텍스)와 양효진(현대건설)이 경쟁했다. 개인성적은 양효진(308득점,12서브에이스,63블로킹)이 배유나(254득점,15서브에이스,55블로킹)를 앞섰지만 우승 프리미엄의 배유나가 신인왕이 됐다.
이밖에 하준임, 이보람(이상 도로공사) 백목화(현대건설) 김혜진(김나희로 개명) 우주리, 전유리(이상 흥국생명) 이연주(KGC인삼공사) 등도 큰 활약을 했다. V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신인이 동시에 빛났던 시즌이다.
●신인드래프트에서 엇갈렸던 운명
지난해 9월19일 강남구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벌어진 2018년 신인드래프트. 1순위 구슬을 잡은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주저 없이 원곡고의 이주아를 지명했다. 박은진(선명여고)과 함께 고교생 국가대표여서 상위지명은 확실했지만 박은진의 1순위 지명을 다수가 점치고 있었다. 예상 밖이었다.
박미희 감독은 “우리 팀에 필요한 스타일이다. 김세영이 정적인 미들블로커여서 이동공격을 잘하는 이주아가 우리 팀에 더 맞는 선수라고 판단했다.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점도 참작했다”고 말했다.
2순위 KGC인삼공사는 박은진을 선택했다. 서남원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경남여고의 정지윤도 내심 생각했다.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소속 학교로부터 양해를 얻어 정지윤과 합동훈련을 하며 기량을 정밀하게 평가했다. 서남원 감독은 탄력성과 공격능력,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팀 구성상 한수지 한송이 유희옥 등이 있는 미들블로커보다는 윙공격수 보강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지만 그렇다고 최고유망주를 다른 팀에 넘겨주는 것도 전략상 옳지 않다는 판단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결국 최종선택은 박은진이었다.
사실 박은진은 GS칼텍스가 가장 탐내던 선수였다. 미들블로커 보강이 절실한 팀 사정상 이주아 박은진 가운데 누구라도 남으면 뽑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아쉽게도 3순위로 차례가 오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박혜민(선명여고)을 지명했다. 정지윤은 4순위로 현대건설 유니폼을 입었다.
●전설적인 미들블로커 선배의 배려 속애서 출발한 이주아
현역시절 얄미울 만큼 배구를 잘했던 미들블로커 출신의 박미희 감독은 관심이 많은 슈퍼루키 이주아의 기용을 놓고 “팀 사정이 좋을 때 부담 없는 상황에서 내보내겠다”고 했다. 여성감독 특유의 섬세함이 드러났다.
1~2라운드 교체선수로 시작해 차츰 출전시간을 늘려간 이주아는 경쟁을 통해 선배를 밀어냈다. 이제는 김세영과 함께 중앙을 지키는 든든한 주전이 됐다. 장점인 이동공격은 흥국생명의 중요한 공격옵션으로 자리할 정도로 위력이 있다. 팀 선배 김나희의 이동공격이 스피드에 장점이 있다면 이주아는 타점이 더 높다. 주변에 롤 모델 선배들이 많아서 좋은 점을 빨리 배웠다.
이주아는 미들블로커에게 필요한 네트 앞에서의 플레이에 특히 강하다. 경쟁다보다 빛난다. 2단 연결은 정확하고 침착하다. 배구센스도 있다. 경쟁 팀의 선배가 “프로 물을 몇 년 먹은 것 같다”고 칭찬할 정도다. 빠른 시간 안에 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능력은 기록 이상이다.
●팀의 부진 속에서 기회를 잡은 정지윤
정지윤의 프로무대 출발은 힘들었다. 외국인선수 베키가 흔들리자 뜻하지 않은 출전기회가 찾아왔다. 리시브를 가담하는 역할을 맡겼지만 실패했다. 그런 면에서 프로의 벽은 높았지만 기회는 다른 곳에서 왔다. FA보상선수로 받은 정시영이 부상을 당했다. 이도희 감독은 대타로 정지윤을 선택했다.
감독의 표현처럼 “미들블로커 속성과외”를 받았다. 효과가 빨리 나왔다. 중앙에서 빼어난 탄력으로 공격능력을 보여줬다. 키는 경쟁자보다 떨어지지만 힘과 파워 점프능력이 빛났다. 2일 도로공사와의 경기 3세트 24-23에서 배유나의 중앙공격을 혼자서 가로막고 세트를 따낸 것은 그날 경기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시즌 초반 정지윤의 역량을 탐낸 팀에서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현대건설은 당연히 거부했다. 윙 공격수로서의 능력치도 여전히 기대되지만 팀 사정상 당분간은 미들블로커로 활약할 듯하다. 배유나가 2007~2008시즌 GS칼텍스에서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정지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궁금하다.
●발전 속도가 가장 빠른 박은진
박은진의 V리그 데뷔는 라이벌 가운데 가장 늦었다. 배구를 시작한 시기도 동기들보다 늦었다. 그래서 기본기가 떨어지는 단점도 보이지만 발전 속도는 가장 빠르다. 타고난 신체조건도 3명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
서남원 감독은 그를 지명한 뒤 “팀 사정상 윙공격수가 필요한데 그 역할이 가능한 지 테스트해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물론 포지션변경은 없었다. 박은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미들블로커로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박은진은 이주아와 정지윤의 장점을 합쳐놓은 스타일이다. 외국인선수 알레나가 빠진 이후 9연패를 기록한 팀 사정상 중앙에서의 역할이 커졌지만 그 때마다 잘 해냈다. 중앙에서 오픈공격과 이동공격, 속공이 모두 가능하다.
12월16일 GS칼텍스전에서 10득점하며 경쟁자 가운데 가장 먼저 두자릿수 득점을 했다. 5일 현대건설전에서는 17득점으로 자신의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도 세웠다. (정지윤은 13득점, 이주아는 8득점이 개인 한 경기 최다득점).
이제 신인왕 레이스는 3분의 2를 넘어섰다. 시즌 끝까지 부상 없이 완주한다면 이들 가운데 한 명은 평생 따라다닐 영광스런 훈장을 받을 것이다. 비록 지금 첫 출발은 이들 3명에게 밀렸지만 IBK기업은행 문지윤, GS칼텍스 박혜민, 인삼공사 이예솔 나현수도 훌륭한 자질을 갖춘 기대주다. 마지막 배구인생에서의 승자는 누가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치지 않고 오래 열심히 한 선수에게만 그 기회는 온다. 프로 첫해에 신인드래프트 1순위 배유나에 신인상을 내준 4순위 양효진이 지금 통산득점과 블로킹에서 멀찌감치 앞서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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