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스즈키컵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정상으로 견인했던 박항서 감독은 잠시 한국을 찾았을 때 “베트남 국민들이 대회마다 바라는 기준이 좀 다르다”면서 “스즈키컵은 비슷한 수준의 국가들의 대결이고, 국민적인 염원이 커서 부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시안컵은 강팀들이 너무 많아 기대치가 높지 않다”며 웃었다.
그러나 곧바로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회를 준비하는 것은 차이 없다”는 말로 지도자로서의 다른 승부욕을 전한 바 있다. 동시에 그는 “지혜롭고 슬기롭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 다짐한다”면서 “내년에도 우리 국민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를 전한 바 있다.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박항서 감독을 영입한 가장 큰 이유인 스즈키컵에서 10년만의 우승이라는 결실을 맺었으니 아시안컵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당사자는 달랐다. 대충하고 싶지 않았고 또 이기고 싶었다. 박 감독은 “2018년은 기적과 같은 승리와 행운이 따른 해”라고 말하면서도 “2019년에도 그러지 말란 법 없다. 더 큰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다”며 배에 힘을 줬는데, 또 사고를 쳤다.
베트남은 20일(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르단과의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전에서 1-1로 비긴 뒤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4-2로 승리, 8강에 올랐다. 동남아시아 대회가 아니다. 아시아 전체가 모인 대회에서 8위 안에 들었다.
박 감독 스스로도 “조별리그만 통과해도 베트남 축구에는 크나큰 성공이라 생각한다”고 객관적인 지향점을 전했었으니 여기저기서 다시 ‘기적’ ‘매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마냥 마법의 공으로 돌린다면 철저하게 준비한 이들의 노력이 섭섭하다. 박 감독은 겸손하게 또 영리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준비했다.
요르단을 상대로 베트남은 120분 동안 끊임없이 뛰고 또 뛰었다. 전반 막바지 선수들의 체력이 다소 떨어지는가 싶었으나 후반전 시작과 함께 새 경기가 시작된 것처럼 달라졌고, 이런 상황에서 동점골이 나왔다. 그리고 연장 전후반까지 대등하게 마친 뒤 승부차기에서 8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체력과 조직력, 전력이 열세인 팀이 경쟁력을 빠르게 갖출 수 있는 길이 열쇠였다. 선수들에게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됐는데 육체, 정신적으로 피곤하다는 것은 변명이다. 선수들에게 끝까지 싸우라고 주문했다”고 박 감독이 밝혔듯 강한 정신무장이 뒷받침 됐기에 한 팀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코치로 나섰던 2002월드컵 때 한국대표팀의 경쟁력을 떠오르게 하는 베트남이다.
돌아보면 이전 대회들도 그랬다. 지난해 스즈키컵을 통해서 그리고 앞선 U-23챔피언십이나 아시안게임에서 파악된 베트남 축구의 가장 큰 변화는 선수들의 활동량이었다. 처음에는 ‘오버페이스’가 아닌가 싶었으나 90분 내내 스피드와 스태미나를 유지했다는 게 놀랍다.
다소 거칠게 전쟁을 운운하며 투혼을 말했지만, 경기 당일 “최선을 다해야한다”라고 강하게 외친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과학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이번 대회를 준비했다는 방증이다.
선수나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져도 되는 경기는 없다”라는 것이다. 특히 프로라면, 나아가 나라를 대표해서 출전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에 합당한 책임감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잘하는 국가들이 많이 출전한다고 아시안컵을 대충 준비했다면 베트남의 8강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박항서 감독은 마법사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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