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축구 사상 첫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새 역사를 쓴 U-20 대표팀이 금의환향한 때가 6월17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더 지난 25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정정용 감독을 만났다. 주말을 고향 대구에서 보내고 막 상경했다는 정 감독은 좀 쉬었냐는 질문에 “전혀 못 쉬었다”면서 크게 웃었다.
쉴 수 없던 스케줄이 맞다. 돌아오던 날 시청에서의 대규모 환영식을 시작으로 각종 인터뷰를 비롯한 크고 작은 행사가 쏟아졌고 대통령 내외와 함께 했던 청와대 만찬도 있었다. 가족들을 보기 위해 내려갔던 대구에서는 대구FC의 K리그1 홈경기 시축을 맡기도 했다. 인터뷰 중에도 전화벨이 연신 울렸다.
정 감독은 “바쁘지만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 다신 없을 좋은 추억을 쌓고 있다”면서 많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세계 2위’ 금자탑과 함께 한국 축구의 역사가 바뀌었고, 동시에 축구인 정정용도 역전에 성공했다.
알만한 이들에게는 ‘속이 꽉 찬 지도자’ ‘유소년 축구 전문가’ 소리를 들었던 정정용 감독이지만 사실 대중적 인지도는 떨어졌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던 현역 시절을 포함, 지금껏 무명이었고 더 냉정히 말해 ‘흙수저’라 불러도 무방할 과거의 소유자다. 그랬던 그가 이 악물고 키운 내공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 현실감 떨어졌던 정정용호, 끝까지 갔다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 재밌을 것 같다.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팀들의 목표는 ‘우승’ 아니겠는가. 우리도 우승을 할 수 있는 멤버라 생각한다. 목표는 최대한 크게 잡으라고 했다. 폴란드에 오래 있다가 돌아오겠다.”
지난 4월 중순 ‘2019 FIFA U-20 월드컵’ 대표팀이 파주NFC에 처음 모였을 때 이강인이 전한 출사표다. 그때는 이강인의 비범한 재주가 확인되지 않았을 때고, ‘막내 형’ 기질이 있는지도 몰랐을 때다. 당시 여론은 좀 싸늘했다. 부러 꼬리를 내리고 임할 필요는 없겠으나 너무 과한 목표 설정 아니냐는 우려였다.
감독이라도 현실 감각이 있어야 했는데, 정정용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줄였다는 목표가 4강이었으니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설레발치다 일을 그르쳤다’는 여론이 형성되진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들의 다짐이 모두 참이 됐다.
정 감독은 “솔직히 (목표를 너무 높이 잡아)나도 걱정은 했다. 선수들을 소집한 후에 ‘인터뷰 대처법’이나 ‘목표 설정’에 대한 브리핑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사실 출발은 정정용 감독 자신이었다.
그는 “지난해 AFC 챔피언십(준우승)에 다녀오면서 느낀 게 있었다. 당시 목표는 ‘월드컵 본선 티켓이 주어지는 4강만 들자’였다. 그런데 이게 선수들에게 영향을 주더라”면서 “4강 티켓이 걸린 타지키스탄과의 8강에서 선수들이 너무 경직됐다. 1-0으로 앞서 나가자 지키려하고 억지로 버티려하더라. 감독의 방침이 선수들 마음속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챔피언십을 마치고 복귀하던 인천공항 때 큰 이상향을 펼쳤다.
정 감독은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에서 내가 그랬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만약 제대로 다 갖춰진다면 8강 나아가 4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애들을 위해서도 목표를 높게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면서 “왜 부담이 없었겠는가. 조추첨도 최악(포르투갈-남아공-아르헨티나)이었는데. 오죽했으면 집사람이 ‘빨리 축구 공부 좀 하라’고 닦달했겠는가”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시작된 폴란드 여정은, 이강인의 출사표처럼 오래오래 이어졌다.
지난 6월11일(현지시간) 에콰도르와의 4강전을 앞두고 폴란드 루블린 스타디움에서 만난 정 감독은 “이번 대회에 두 가지 꿈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어게인 1983’(4강 재현)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 팀이 7경기를 뛰는 것(3/4위전 혹은 결승까지 치렀을 때 경기 수)이었다”고 말한 뒤 “말도 안 되는 꿈이었으나 이뤄졌다”는 멋진 발언을 전했다.
그리고는 “이제는 아시아의 자존심을 걸고 싸워보고 싶다.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정정용호는 이튿날 에콰도르를 1-0으로 꺾었고, 결국 끝까지 갔다.
◇ “나는 다 된 것 같지만, 상대는 아닐 수 있다”
정 감독은 대회 전까지 무명에 가깝던 지도자다.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로 10년 동안 지내며 유소년 축구 발전에 기여했으나 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선수 시절이 밋밋했다. 프로 경력은 없다. 대학 졸업 후 실업팀 이랜드 푸마에서 뛴 것이 마지막이었다. 지도자로서도 음지에 있었다. 지금까진 빛날 구석이 없었다.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U-23 대표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자 김학범 감독의 지도력이 크게 부각됐다. 맞물려 김 감독을 향해 ‘비주류의 반란’이라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만약 김학범 감독이 비주류라면, 정정용 감독은 ‘흙수저’라 불러도 무방할 과거의 소유자다. 정 감독도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배우고 익혔다”고 했다.
정 감독은 “선수로서는 좀 그랬을지언정 지도자로서는 다르고 싶었다. 딱 까놓고, 내가 유명한 내 동기들과 지도자 대 지도자로 붙었을 때 위에 있을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게 무엇이냐? 나에게 물었고 답은 ‘배워야 한다’였다. 그게 바탕이었다”고 회상했다. 더 겸손했고 보다 부지런했다.
A급 지도자 자격증을 위해 교육 받던 2003년의 일화다. 그는 “내가 남들보다 컴퓨터도 빨리 배웠다. 남들이 다 OHP(OVERHEAD PROJECTOR)로 발표할 때 난 PPT(POWERPOINT)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남들이 필름 넘길 때 난 파주NFC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광경을 연출했다”고 회상한 뒤 “내가 경쟁자들을 이기려면 그래야했다. 남들보다 더 배우고 노력하고 준비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발판이었다”고 전했다.
마냥 뜨거웠던 것만도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점검이 항상 뒤따랐다. 정 감독은 “지금부터 한 20년 전쯤 처음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경기도에 있는 중학교의 코치로 처음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열과 성의를 다 쏟았던 때였다”고 말한 뒤 “어느날 내게 큰 가르침을 준 사건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훈련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선생님이 하는 말의 반밖에 못 알아 듣겠다’는 내용이었다”면서 “아이들이 민망할까봐 화장실에서 한 30분 앉아 있었는데, 정말 충격 먹었다”고 되짚었다. 뛰쳐나가 화를 낸 것이 아니라 고민했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정정용 축구철학의 근간이다.
그는 “지금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도 그때를 떠올린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해시키라고 말한다. 지도자 입장에서는, 난 다 된 것 같은데 상대는 안 됐을 수 있다”면서 “확인하고, 물어보고, 진짜 이해가 됐는지 소통해야한다. 어린 선수들일수록 더 중요하다. 감독은 된 것 같지만 선수는 절대 아닐 수 있다”는 중요한 포인트를 짚었다.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고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독단으로 향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
그 겸손한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 축구사에 큰 획을 남길 수 있었다. 정 감독은 “예전부터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은 있었다. 대중들은 잘 모르더라도, 그래도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괜찮은 축구지도자 정정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스러운 삶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제는 대중들도 그가 멋진 축구인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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