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김학범 감독은 와일드카드 손흥민, 황의조와 함께 나상호를 공격의 핵심 카드로 활용했다.
당시 나상호의 소속팀은 K리그2 광주FC(현재는 J리그 FC도쿄)였다. 대회 직전까지 K리그2 득점 선두를 달리는 등 물오른 감각을 자랑하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2부리거’가 중요한 무대에 선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하지만 김학범 감독은 소신 있게 발탁했다. 그냥 백업요원으로 여긴 것도 아니다. 나상호는 황의조와 투톱, 혹은 손흥민-황의조와 스리톱으로 나서는 등 주축 전력이었고 생각보다 당찬 움직임으로 결국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워낙 황의조, 손흥민 등에 시선이 집중돼 조명이 덜했으나 나상호의 발견은 꽤 큰 수확이었다.
김학범 감독에게만 특별한 재능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파울루 벤투 A대표팀 감독은 김학범 감독만큼, 외려 그 이상으로 나상호라는 젊은 피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지난해 막바지부터 벤투호에 합류하기 시작한 나상호는 소집 때마다 어떤 형태로든 출전 기회를 잡으면서 벤투 감독의 신뢰를 쌓아나갔다. 어지간한 유럽파들이 벤치를 지킬 때 나상호는 필드를 밟았으니 팬들 사이 ‘벤투의 양아들’이라는 농담까지 들릴 정도였다. ‘또 나상호냐’는 볼멘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선택은 옳았다.
축구대표팀은 10일 밤(한국시간) 투르크메니스탄 아시가바트에서 열린 투르크메니스탄과 ‘2022 FIFA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H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2-0으로 승리했다. 개인 8번째 A매치에 나선 나상호가 선제 결승골의 주인공이 됐다.
팬들이 예상한 공격자원 거의 대부분이 선발로 나섰다. 간판 공격수 손흥민과 황의조 그리고 조지아전에서 체력을 비축한 이재성과 황인범이 출격했다. 하지만 나상호의 선발은 다소 의외로 느껴졌다. 오스트리아리그에서 펄펄 나는 황희찬도 있었고 왼발이 좋은 권창훈도 있었다. 하지만 벤투의 선택은 ‘좁은 공간 기술자’ 나상호였다.
손흥민, 황의조와 함께 전방에 배치된 나상호는 시작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반 9분 박스 안 오른쪽 각이 많지 않은 곳에서 패스가 아닌 슈팅을 시도하며 ‘욕심’도 내비쳤다. 그리고 4분 뒤인 전반 13분, 선제골을 뽑아냈다. 오른쪽에서 이용이 올린 낮은 크로스가 수비 맞고 나오자 문전에서 정확히 밀어 넣었다. 8번째 A매치에서 맛본 데뷔골이었다.
보기에는 ‘주워먹은 골’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 수비 맞고 튀어나오던 공의 스피드가 빨라 집중하지 않았다면, 반응속도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슈팅으로 연결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 상징적 장면을 포함해 나상호는 작은 체구를 보완하는 날쌔고 기민한 움직임으로 공격에 일조했다. 벤투가 원한 옵션이었다.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 1월에 열리는 AFC 아시안컵 최종명단을 발표하던 자리에서 벤투 감독은 문선민(전북현대)이 제외된 것에 대한 질문에 “윙을 택하면서 기준이 있었다. 일단 멀티 능력을 갖춰야했다. 윙이면서 스트라이커를 볼 수 있는지, 윙이면서 공격형MF에 배치될 수 있는지 살폈다”고 말했다.
이어 “좁은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들, 압박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지켜봤는데, 문선민은 공간이 있을 때 플레이가 더 좋다”고 소개했다. 문선민만의 매력이 있으나 자신이 원하는 유형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 설명을 반대로 풀면, 나상호의 장점이다.
이천수 해설위원은 “밀집수비로 나설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기에서는 공간 활용이 능한 이들보다는 나상호처럼 좁은 공간에서 볼 다루는 기술이 좋은 선수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벤투 감독이 노리는 부분도 같은 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이날 나상호는 후반 20분 권창훈과 교체돼 경기를 마쳤다. 지금껏 주로 교체로 뛰었던 나상호가 주어진 기회를 잡았던 경기다. 2차예선 상대들이 투르크메니스탄처럼 밀집수비를 들고 나올 공산이 크다는 것을 감안할 때, ‘좁은 공간 기술자’의 입지는 더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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