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KGC인삼공사-도로공사 경기 뒤 인터뷰에서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풀세트 접전 끝에 도로공사에 3-2로 이긴 서남원 감독이었다.
이날 인삼공사는 프로 4년차 기대주 지민경이 10득점하는 활약에 힘입어 승리를 거뒀다. 최근 2시즌 동안 끝 모를 부진에서 허덕이던 지민경은 1세트부터 선발로 출장하며 리시브와 공격 서브 등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서남원 감독은 “내게 있어서는 아픈 손가락인데 예쁜 손가락으로 크자고 애기한다. 본인도 해내고 싶은 욕심은 많다. 승부욕도 있지만 경기에서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웠다. 비시즌 내내 연습을 했지만 정작 게임에서는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이전 시즌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몸이 아파 투입을 못했지만, 올 시즌을 앞두고는 꾸준하게 참여하고 역할을 해줘서 기대를 했다. 오늘 경기를 보니 내가 지민경을 꾸준하게 투입했어야 하는 믿음이 부족했나 하는 반성이 있다. 뒤로 갈수록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서 다행”이라고 했다. 감독이 경기에 공을 세운 선수를 칭찬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속에 담긴 자기반성이 눈길을 끌었다.
● 감독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동안 기대주 지민경의 부진을 놓고 서남원 감독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V리그 감독 가운데 팬의 비난에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때로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우리 팬들은 가끔씩 감독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착각한다. 선수의 기량발전, 경기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모두 감독이 책임이라고 믿는다. 물론 감독도 일정부분 책임은 있겠지만 결국은 얼마나 성실하게 기량을 닦고 훈련한 만큼 대범하게 경기를 하는지는 선수의 몫이다. 명장은 좋은 선수들이 만든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서남원 감독은 그 전에 조금 더 기회를 주지 못하고 부진할 때 참고 기다려주지 못했던 것을 먼저 미안해했다. 이처럼 선수와 감독 사이에 신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겉에서는 쉽게 알지 못한다. 때로는 선수가 기대 이하의 행동을 해도, 눈에 띄는 실수로 경기를 말아먹어도, 어떤 때는 질책을 하고 어떤 때는 교체하고 어떤 때는 계속 뛰게 하며 선수와 밀당을 거듭하며 믿음을 줘야한다. 오직 결과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런 다양하면서도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밀당과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사자들만이 아는 믿음이 쌓여가고 선수는 감독을 따른다. 이렇게 서로를 믿는 선수들이 많아지면 그 팀은 감독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신뢰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다. 감독이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 것이 맞는다고 선수들이 믿으면 뜨거운 불 속이라도 함께 뛰어 들어간다. 그런 단결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선수와 지도자의 굳건한 상호신뢰다.
● 교체된 선수의 자존심을 먼저 생각하는 박기원 감독
대한항공은 순천 KOVO컵부터 시작해 7연승을 내달리다 삼성화재~OK저축은행에 연패 당했다. 삼성화재 경기는 외국인선수가 없다고 자만했다는 평가였지만 그 다음 OK저축은행과의 0-3 완패는 충격이었다. 2연패 이후 주위에서 많은 말들이 나왔다. ‘자만’과 ‘배부른 선수들’은 물론이고 ‘감독의 선수교체 타이밍’등도 입에 올렸다.
그러나 박기원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누구보다도 경기에 이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을 믿었기에 질책 대신 마음의 평화를 주는 힐링을 선택했다. 선수들도 베테랑 감독의 깊은 뜻을 빨리 알아차렸다. 10월31일 우리카드 경기 때는 지난 시즌 MVP 정지석이 긴장한 나머지 손에 쥔 물병이 흔들릴 정도로 선수들 스스로 경기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선수들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이겼다.
“그 선수가 못한다고 즉시 빼면 감독은 욕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빠진 선수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나. 선수와 감독의 신뢰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기는 선수가 하는 것”이라고 박기원 감독은 평소에 자주 얘기한다. 그렇게 참고 기다리며 선수들 대신 비난의 화살을 감독이 맞아준 덕분에 대한항공은 고비를 일찍 빠져나왔고 4연승을 내달렸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때로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해야 하고 그저 욕을 먹어가면서 선수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이 프로팀 감독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감독의 속이 수십 번 문드러져야 신뢰는 쌓여간다.
요즘 몇몇 팀에서 성적이 나오지 않자 선수와 감독의 신뢰를 언급하는 말들이 들린다. 선수와 감독은 시즌이라는 긴 항해를 이제 시작했다. 태풍은 일찍 올수도 늦게 올 수도 있다. 물론 중간에 좌초하는 배도 있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얘기를 모른 채 함부로 말하기보다 조금 더 참고 기다려주면 배는 결국 목표하는 곳에 도달한다. 신뢰는 인내가 만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