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경기였다. 하나는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다른 하나는 평가전. 레바논과 붙은 경기는 일단 결과가 필요했고, 브라질과 6년 만에 재회한 평가전은 승패를 떠나 경쟁력을 확인하는 장이었다.
먼저 레바논 적지에서 치른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상대국 정세는 최악으로 치달은 상태였고, 10월 북한 원정에 이어 또다시 무관중 경기가 펼쳐졌다. 결과는 0-0 무승부였다. 한국은 승점 1점을 추가해 조 상위권을 지켰다. 물론 1위가 아니면 다음 라운드로 직행할 수 없기에 더욱 분발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당일 현장 분위기는 싸늘했다고 한다. 지도자 낙마 얘기까지 튀어나왔다. 레바논 기자가 한국의 2차 예선 2연속 무승부를 꼬집으며 파울루 벤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안위를 걱정했다. 이에 벤투 감독은 “경질되면 연락드리겠다”고 받아쳤다. 사뿐히 밟고 올라설 줄 알았던 아시아지역 예선 첫 라운드부터 날이 꽤 서 있었다. “2차 예선부터 걱정할 거라면 월드컵에 나가선 안 된다”던 주장 손흥민의 과거 발언도 힘을 잃었다.
FIFA 랭킹과 따로 노는 중동
실제 내용은 답답했다. 전체적으로 골키퍼 김승규나 중앙 수비수 김민재가 눈에 띄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부지런히 슈팅을 시도하긴 했으나 불행하게도 딱 하나가 걸리질 않았다. 황의조가 날린 회심의 헤더는 야속하게도 골대를 때렸다.
중동팀과 졸전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싶다. 이쯤 되면 ‘내려놓는 미덕’을 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크게 기대하지 않기, 더 나아가 기대 자체를 하지 말기. 벤투호를 향한 실망이 아니라, 상대국의 특수성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한국은 근 10년간 레바논에서 딱히 재미를 보지 못했다. 2015년 3-0 완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2011년에는 패배 충격으로 조광래 전 감독이 경질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꼽히는 원인은 환경 차이다. 유럽도 넓고, 남미도 넓다. 하지만 월드컵 예선을 진행하는 대륙 가운데 아시아만큼 광활한 곳도 없다. 극동 아시아에서 오랜 비행을 감수하며 내디뎌야 하는 중동은 공기부터 다르다. 정상적인 경기력을 펼치기 어려울 수밖에. 가령 남미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이는데,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볼리비아행은 죽음의 원정으로 통한다. 천하의 리오넬 메시도, 네이마르도 맘껏 누비지 못했던 곳이다. 사막 기후의 중동도 마찬가지다. 레바논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일대 전체가 그렇다.
여기에 축구 자체의 문제도 있다. 팀 스타일 측면에서 상생관계가 형성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축구도 손뼉을 맞대야 소리가 난다. 예로부터 한국과 중동팀 간 경기 양상은 왠지 모르게 파열음이 일었다. 승패를 떠나 내용 면에서 물 흐르듯 흘러간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서로 맞지 않는 팀끼리 붙여놨을 때 나오는 현상이라고 본다. 처진 흐름에 뭔가 찜찜한 모양새가 나오곤 했다.
우리는 중동 축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떠오르는 이미지는 시간 지연에서 기인한 ‘침대 축구’ 정도? 플레이 스타일과 관련된 특성을 뽑아내기가 모호하다. 기껏해야 “선수 개개인의 피지컬이 좋고, 기술과 스피드가 빼어난 일부 공격수의 역습이 위협적”이라는 내용 정도인데, 한국 선수들이 이런 축구에 얼마나 익숙해 있느냐가 문제다. 물론 심심찮게 엮여왔다.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아시안컵, 아시아경기 등. 다만 이러한 제도적 강제성이 없으면 따로 만날 일이 없는 팀들이다. 그렇다 보니 평소 심도 깊게 고민하고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도무지 가까워지기 힘든 국가들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
이런 상황이라면 적지에서 거둔 승점 1점도 감지덕지일 수 있다. 때로는 결과만 잡아도 본전 이상이다. 중동 원정이 딱 그렇다. “아시아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로 나아가느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성격이 좀 다르다. FIFA 랭킹으로 세계 각국을 줄 세워놓긴 했어도, 중동의 경우는 별도 카테고리에 넣어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중동팀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강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까다로운 구석이 있다. 어느 감독이 한국을 이끌든 쉬이 개선될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물론 벤투 감독의 선택에는 물음표가 붙었다. 경직된 선수 기용이 이번에도 도마에 올랐다. 이 부분은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다. 벤투 사단이 한국 축구에 선진 훈련법과 시스템을 접목해왔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일단 보여지는 경기력 등에서 증명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고유 권한’이라는 보호막이 내부 경쟁 없는 ‘아집’으로 흘러갈 우려도 존재하는 게 사실.
닷새 뒤 브라질과 평가전은 한층 고무적이었다. 결과는 0-3 대패. 전반 10분도 안 돼 루카스 파케타에게 한 골을 먹혔다. 상대는 확실히 잘했다. 개개인이 특유의 유연함으로 리듬을 자아냈으며, 이들이 뭉쳐 합주를 시작할 땐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전반 종료 전 필리페 쿠티뉴에게 프리킥 추가 실점을 헌납했고, 후반 들어서는 다닐루에게 한 골 더 허용했다.
하지만 내용은 레바논전과 비교해 훨씬 더 실했다. 결정적 차이로 점수가 벌어지긴 했어도 죽이 맞았다. 상대가 적극적으로 나오니 받아칠 여지가 있었다. 타이틀이 걸린 대회가 아니어서 조심스레 웅크릴 이유가 없었다. 또 브라질이 구사하는 축구에도 꽤 익숙해 보였다. 브라질과 격돌한 건 이번이 고작 여섯 번째였지만, 모두가 세계 축구의 조류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유럽 빅클럽 소속인 브라질 선수단. 여기에 손흥민, 황희찬, 황의조 등이 유럽 대항전이나 자국 리그 등에서 이들과 격돌해본 경험이 있었다. 직접 부딪혀보지 못한 이들도 평소 미디어 등으로 자주 접해왔기에 이질감이 크지 않았다.
기대감 높인 한국 대표팀
유럽의 톱클래스 공격수 손흥민은 확실히 자신감이 있었다. 상대 수비에 막힌 적도 꽤 많았지만, 결정적 슈팅을 몇 차례 날리며 상대를 위협했다. 좌우 측면 수비수 김진수-김문환의 공격 가담, 주세종의 정확한 롱패스도 눈여겨볼 만했다. 중원에서 더 공격적인 패스가 이뤄지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게 결국 실력 차이고 몸값 차이다. 브라질 선수들과 맞선 상대성이 있다 보니 쉽지만은 않았다. 교체 타이밍을 좀 더 일찍 잡아 다양한 선수를 써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플랜 A의 경쟁력을 더 오래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기뻤던 건 동기 측면에서다. 이런 평가전은 굉장히 귀하다. 더욱이 이번 매치업은 브라질 측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성사됐다. 지난해 러시아월드컵에서 독일을 잡으면서 생긴 위상 변화가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벤투 감독 부임 이래 우루과이, 콜롬비아 등 양질의 평가전을 치른 한국은 브라질전까지 소화했다. 경기 중 심리적으로 쫓겨 정상적인 플레이를 펼치지 못할 때도 있었으나 경험 면에서는 가치가 충만했다. 계속 붙어봐야 나아갈 수 있다. 대표팀이 경기 후 패배 아쉬움보다 “많이 배웠다”고 복기한 것도 그 때문일 테다.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 팀과 겨뤘으니 카타르월드컵 등 메이저대회에서 비슷한 국가와 만나도 한결 수월하리라 본다.
한국 축구는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유럽파를 총집결한 2019년 마지막 A매치를 이렇게 마쳤다. 올해 초 겪었던 아시안컵 8강 탈락의 아쉬움은 얼마나 털어낸 걸까. 다음 달 열릴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에서는 또 어떤 신예가 나타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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