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는 키가 깡패’라고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말했다. 네트를 두고 경기를 하기에 높이는 중요하다. 미들블로커와 세터를 겸임하며 대단한 선수생활을 했던 박미희 감독도 신장 174cm로 장신은 아니었다. 그 것을 커버한 것은 빼어난 센스였다. 그래서인지 배구아이큐 높은 선수를 유난히 좋아한다.
신장 180cm의 김나희도 미들블로커로는 큰 키가 아니다. V리그 신인드래프트 역사상 풍년의 해였던 2007~2008시즌 1라운드 끝 순번인 5순위로 흥국생명에 지명 받은 것도 사람들이 배구센스보다는 키를 먼저 생각해서였다.
그 앞에 지명된 선수들이 배유나~이연주~하준임~양효진이었다.
김나희는 은퇴한 진혜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루키 시즌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10시즌동안 170~274~217~206~230~195~247~192~222~163득점을 했다. 항상 제 역할을 하는 신뢰감 있는 선수였다. 연차가 쌓여가면서 상대 블로킹과 코트를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그가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흥국생명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연경이 2008~2009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끝으로 떠났다. 이후 흥국생명은 암흑의 시기를 겪었다.
2014~2015시즌을 앞두고 박미희 감독이 새로 지휘봉을 잡았다. 이재영도 입단했다. 2015~2016시즌 마침내 5년 만에 봄 배구에 나갔다. 그 때 김나희의 배구센스가 가장 빛났던 경기가 6라운드에 나왔다. 그해 처음으로 트라이아웃을 통해 뽑은 외국인선수 테일러가 문제를 일으켰다. 족저근막염을 이유로 4라운드부터 출전을 거부했다. V리그 규정의 빈틈을 이용한 태업처럼 보였지만 아프다는데 뛰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사이 팀은 5라운드에 4연패를 했다. 시즌 내내 잘 지어놓은 농사를 하루아침에 망칠 위기였다. 부랴부랴 대체 외국인선수로 알렉시스를 영입했다. 공격능력이 한참 떨어졌다. 6라운드 IBK기업은행과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박미희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뜻밖에도 김나희를 OPP자리에 투입했다. 공격의 활로를 뚫기 위해 그의 빼어난 배구센스를 믿었다.
중앙여고시절 미들블로커와 OPP를 경험했던 김나희는 그날 16득점을 하며 승리의 주역이 됐다. 덕분에 흥국생명은 봄 배구에 나갈 동력을 얻었다. 좋았던 때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7~2018시즌부터 김나희의 출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다. 게다가 2018~2019시즌 FA선수 김세영과 신인드래프트 1순위 이주아가 입단하자 더욱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한 번씩 경기의 변화를 위해 투입되면 그만한 선수도 없었다. 코트에 들어가면 경기 전체의 흐름과 템포를 바꾸는 능력은 여전했다.
이런 능력을 알았기에 8일 GS칼텍스와의 3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박미희 감독은 김나희를 선발로 낙점했다. 시즌 초반 블로킹 훈련도중 손가락 인대를 다쳐 뛰지 못하던 터였다. 감독은 GS칼텍스전이 전반기 시즌의 분수령으로 보고 올인을 작정했다. 중요한 순간에 선택했던 김나희는 기대 이상을 했다.
그가 들어가자 시즌 내내 답답했던 플레이의 템포가 빨라지고 생기가 넘쳤다. 코트 좌우로 달려가는 그의 빠른 발에 GS칼텍스의 블로킹은 따라가기 바빴다. 덕분에 이재영 앞에는 모세의 기적처럼 블로킹 벽이 열렸다. 상대 수비가 준비하기도 전에 끝내버리는 빠른 속공과 반 박자 빠르게 시도하는 다양한 변칙공격에 GS칼텍스의 블로킹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격뿐만이 아니었다. 감독들이 평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밀한 플레이 일명 잔볼 처리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가 궂은일과 설거지를 잘 해주자 흥국생명의 배구는 훨씬 깔끔해졌다.
박미희 감독도 “시즌 최고의 경기력”이라고 했다. 패한 GS칼텍스 차상현 감독도 인정했다. 모두 김나희 효과였다.
배구는 키도 중요하지만 빠른 발과 센스가 있으면 성공한다는 것을 김나희는 보여줬다. 혹시 지금 키가 작아서 고민인 어린 선수들이 있다면 꼭 김나희를 보고 배웠으면 한다. 3박자의 배구는 템포와 리듬, 센스의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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