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1년만 버티자 생각… 베트남은 마지막 불꽃 태울 종착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8일 03시 00분


통영서 전지훈련 박항서 베트남 감독

아빠처럼 자상하게…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 최강으로 이끌고 있는 박항서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경남 통영체육관에서 열린 22세 이하 베트남 대표팀의 훈련에서 한 선수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있다. ‘파파(아빠) 리더십’으로 베트남 축구를 업그레이드한 박 감독은 “지나간 성과는 추억이 됐다.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축구 감독의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통영=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아빠처럼 자상하게…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 최강으로 이끌고 있는 박항서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경남 통영체육관에서 열린 22세 이하 베트남 대표팀의 훈련에서 한 선수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있다. ‘파파(아빠) 리더십’으로 베트남 축구를 업그레이드한 박 감독은 “지나간 성과는 추억이 됐다.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축구 감독의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통영=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볼 트래핑 훈련을 하던 22세 이하 베트남 대표팀의 한 선수가 실수로 공을 떨어뜨렸다. 이를 본 ‘쌀딩크’ 박항서 감독(60)이 막내아들뻘인 선수에게 득달같이 달려갔다. 하지만 호통은 없었다. 박 감독은 손으로 선수의 엉덩이를 툭하고 쳤다. 또 다른 선수가 실수를 했을 때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꿀밤’을 때렸다. ‘파파(아빠) 리더십’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대표팀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17일 경남 통영체육관에서 열린 훈련 모습이다. 아침에 내린 비로 통영공설운동장의 잔디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실내에서 진행된 훈련에서 박 감독은 직접 헤딩 시범을 보이는 등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베트남 주장 응우옌꽝하이(22)는 “감독님은 우리의 축구 수준을 높여준 분이다. 감독님 덕분에 베트남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다”고 말했다.

베트남 국가대표팀(A대표팀)까지 맡고 있는 박 감독은 2017년 10월 부임 후 스즈키컵(10년 만에 우승), 동남아시아경기(60년 만에 우승) 등에서 정상에 오르며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 최강으로 키웠다.

베트남 사령탑 부임 전 국내 내셔널리그(3부) 창원시청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내리막을 걷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베트남에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박 감독은 “처음에는 1년만 버티자고 생각했고, 1년 뒤에는 계약 기간만 채우자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 속에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성과는 추억이 됐고, 새로운 도전 앞에 서게 됐다. 거듭되는 도전과 준비, 이것이 축구 감독의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베트남이 마지막 불꽃을 태울 종착지다. “한국 감독은 욕심이 없습니다. 제 지도자 인생은 베트남에서 끝날 겁니다.”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오른 박 감독은 지도 철학을 묻는 질문에 “내게 깊은 철학이 있었으면 한국에서 3부 감독을 했겠느냐”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베트남 선수들이 패배 의식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싸워야 한다” “이건 전쟁이다” 등 강렬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박 감독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뜨겁다. 이날 서울에서 온 박 감독의 한국 팬과 베트남인 등 10여 명이 체육관을 찾았다. 팬들과 “베트남, 꼬렌(파이팅)!”을 외치며 기념사진을 찍은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가 기술적으로는 한국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경제와 축구 등 많은 분야에서 발전을 이뤄낸 한국 기성세대들이 베트남을 보며 몇십 년 전 한국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22일까지 통영에서 훈련하면서 내년 1월 열리는 아시아축구연맹 23세 이하 챔피언십을 준비한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최종예선을 겸하는 이 대회에서 올림픽 개최국 일본을 제외하고 상위 3개 팀이 본선에 진출한다. 사상 첫 올림픽 본선행을 노리는 D조의 베트남은 조별리그 순위에 따라 C조 한국과 8강에서 만날 수도 있다. 박 감독은 “우리는 조별리그 통과가 우선이기 때문에 아직 한국과의 맞대결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는 어렵다”고 했다.

박 감독은 틈틈이 국내 축구계 소식도 챙겨 보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손흥민(27·토트넘)이 넣은 엄청난 골을 하이라이트로 봤다. 축구 선배로서 한국의 보물인 손흥민이 자랑스럽다. 베트남에서 손흥민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어깨를 쭉 편다”고 말했다. 손흥민은 최근 73m를 질주하면서 상대 선수 8명을 제치고 ‘원더골’을 넣었다.

박 감독의 성공 속에 많은 한국 지도자들이 동남아로 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태용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49)은 인도네시아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이 큰 상태다. 박 감독은 “신 감독은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다. 현장 감각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1년 이상 쉬지 말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지도자 생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언어와 관습이 다른 타국에서 감독을 하는 것은 어렵다. 연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향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통영=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박항서#축구#베트남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