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TNT 타임]‘말이 통해야 공도 더 잘 맞는다’ 박세리, 트럼프 대통령 만남과 의사소통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1일 20시 14분


지난 4월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에서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는 박세리.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지난 4월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에서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는 박세리.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2019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게 되는 시기다.

‘원조 골프 여왕’ 박세리(42)도 올해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남겼다. 지난 6월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청와대 상춘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박세리를 기억한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박세리와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 여자 골프를 화제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박세리와 라운딩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히기도 했다.

세계가 인정하는 월드 스타의 위상을 새삼 확인시킨 박세리는 미국 대통령과도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눌 정도의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박세리, 채널A 화면 캡쳐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박세리, 채널A 화면 캡쳐
며칠 전 사석에서 만난 박세리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만남 얘기를 꺼냈더니 “한때 영어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며 웃었다.

박세리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진출 초창기인 1998년 영어를 제대로 못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외국 사람만 다가와도 겁이 덜컥 났어요. 뭐라 말하고 싶어도 잘못 알아들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어요.”

거의 매주 대회에 출전하느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비행기 한번 타려면 진땀 흘리기 일쑤였다. “공항이 미로 같더라고요. 영어 안내 방송은 잘 안 들리고 게이트를 제대로 찾기도 힘들었어요.”

남들이 말이라도 걸까 도망다녔고 경기를 마치면 곧장 라커룸으로 숨기도 했다는 박세리는 언어의 장벽과 맞서보기로 마음억었다. “루키 때 도움을 주던 통역과 결별했어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혼자 부딪치면서 해결해야 입도, 귀도 열릴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는 전화 냉장고 등 집안에 있는 사물에 일일이 영어단어 카드를 붙이고 오며가며 쳐다보고 외우는 방법으로 기초를 닦았다. 또 영어 개인교사, 외국인 캐디와 하루 1시간 이상 일상 대화를 익히며 조금씩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쉴 때는 TV 만화영화를 즐겨 보며 청취력과 표현력을 길렀고 대회에 나가면 동료들에게 일부러 다가가 영어로 말을 걸기도 했다. 인터뷰에 때 기자들이 자주하는 질문 내용과 답변을 달달 외운 적도 있다.

박세리는 “신인 때 성적이 좋다보니까 기자회견에 자주 나갔다. 아마 동문서답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엉뚱한 답을 하더라도 미국 기자들이 이해해 주더라. 오히려 한국에서 온 선수가 어떡하든 영어로 말하려 애쓰는 모습을 좋게 본 것 같다”고 말했다.

KLPGA투어 대회 방송 해설자로 나선 박세리와 김재열 위원.
KLPGA투어 대회 방송 해설자로 나선 박세리와 김재열 위원.

한해 두해 지나가면서 박세리는 미국 현지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 미국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게 됐다. 2011년 유소연이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할 때는 미국 현지 방송의 해설위원으로 등장할 만큼 뛰어난 영어 구사 능력을 보였다. 그런 단계에 오를 때까지 하루 3~4시간씩 영어 공부에 집중 투자하기도 했다.

박세리는 “해외에 뛰는 한국 선수들에게 영어는 필수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도 자신 있게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 최다인 통산 25승을 거두며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어학 실력도 바탕이 됐다는 의미다.

김재열 해설위원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면 외국인 캐디와 호흡도 잘 맞고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동반 플레이를 하는 외국인선수들과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 LPGA투어에서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고진영과 신인상 수상자인 이정은은 시상식에서 영어 연설로 호평을 받았다. 박수갈채를 받기까지 두 선수는 연설문 작성과 낭독 연습 등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육체적으로 혹독한 골프 연습이 오히려 편하게 느꼈을 정도라는 게 고진영과 이정은의 소감이다.

LPGA투어에서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인비는 한때 한국인 동료선수들에게 영어 과외교사로 불렸다. 중학교 때 미국 유학을 떠나 원어민 못지않은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다. 박인비는 논리적이고 차분한 성격을 지녀 미국에서 취재진 인터뷰, 방송 출연, 팬 미팅 행사 등에 단골 손님으로 나선다.


박찬호, 손흥민 등 다른 종목 스포츠 스타들도 언어 장벽을 없앤 것이 성공 비결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야구나 축구 같은 단체종목에서 동료들과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에선 펄펄 날던 선수다 해외 진출 후 침묵하는 사례도 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언어 문제가 지적된다. 설사 ‘콩글리시’라도 넉살 좋게 떠들던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시즌을 마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상위권 선수들은 비시즌 훈련 계획표에 어학 공부 시간도 빼놓지 않고 있다. 해외 진출이나 외국 대회 출전에 대비한 포석이다.

말이 잘 통하면 공도 더 잘 맞는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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