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스크린 앞에 선 그는 수시로 노트북 앞을 오갔다.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듯 했다. 자판을 건드릴 때마다 화면이 빠르게 전환됐다. 경기 영상부터 공격, 토스 분포도 등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리시브 한 공들의 방향이 세터의 앞쪽으로 몰리는 상황을 유심히 보세요. 이 세터의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여기서 공이 예상과 반대로 가니까 원 블로커 상황이 되는 거예요.”
신이라도 난 것처럼 표정이 환해졌다. 18일 인천 송림체육관에서 만난 우리카드 김재헌 수석코치(42)다. 국내 전력분석관 1세대인 그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전력분석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수석코치직을 맡았다. 우리카드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팀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향해 고공비행을 하고 있는 데에는 김 수석코치가 숨은 공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리카드는 18일 현재 승점 61점으로 남자부 1위다.
●경기가 끝나야 시작되는 전력분석의 업무
경기 내내 감독을 보좌하는 김 수석코치의 주 업무는 경기가 끝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복기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준비하는 데만 6, 7시간이 걸린다. 한국배구연맹(KOVO) 자료에 자체 기록지도 따로 만든다. 한 경기에 새로 나오는 분석·영상 자료만 5~6GB(기가바이트) 규모다. 이밖에 감독, 선수들의 요청에 따라 끊임없이 맞춤형 자료들을 만들어낸다. 통상 한 경기를 치르려면 두 차례 비디오 미팅이 열린다.
그는 전력 분석을 위해 이탈리아 프로그램 ‘데이터 발리’를 사용하고 있는데 정해진 매뉴얼을 벗어나 끊임없이 다양한 자료를 만들어낸다. 야구, 축구 등 다른 종목도 참고한다. 그 결과가 우리카드의 ‘기여점수’다. 김 수석코치는 “공격수가 20~30득점을 했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블로킹에 몇 개 걸렸는지, 서브 범실이나 네트터치는 몇 개를 했는지 다 따진 뒤 새롭게 기여점수를 매긴다”고 설명했다. 두 자릿수 득점을 했는데도 기여점수는 마이너스가 나오는 일도 있다. 이번 시즌 우리카드가 가장 범실(588개)이 적은 팀으로 거듭나게 된 데에도 현미경 분석이 역할을 했다.
분석의 기본은 상대 세터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김 코치는 최대 16가지로 나눠 상황별 세트 분포를 파악한다. 예를 들어 리시브가 세터 머리 위, 한 발 앞, 한 발 뒤, 어택라인 근처로 왔을 때의 상황들을 따로 분석하는 것이다. 심지어 한 손 토스, 언더 토스 상황도 일일이 따진다. 분석의 힘을 알고 있어서일까. 선수들도 쉴 틈 없이 코치실을 드나들며 조언을 구한다. 김 수석코치는 “분석보다 더 중요한 건 작전 수행능력이다. 분석은 분명 득이 되지만 독이 되기도 한다는 걸 선수들에게 말하고 싶다. 분석에만 갇혀선 좋은 배구를 할 수 없다”며 분석 만능론을 경계하기도 했다.
●MP3도 쓸 줄 몰랐던 컴맹
실업배구 시절이던 2001년 삼성화재에 입단한 그는 2005년 상무에서 복귀한 뒤 바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레프트였던 그는 같은 포지션의 당대 최고 선수였던 선배 신진식(삼성화재 감독), 석진욱(OK저축은행 감독)에게 밀려서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배구판을 떠날까 고민하던 차에 신치용 당시 삼성화재 감독의 제안으로 전력분석을 시작했다. 김 수석코치는 “당시 나는 MP3에 음악파일도 넣을 줄 모르는 컴맹이었다. 이른 시일 내에 제몫을 하고 싶어 내가 생각해도 미친 듯이 공부했다. 밖에도 안나오고 분석관실에서 살았다”고 했다. 김 수석코치는 2017년 중반 삼성화재에서 우리카드로 옮겼다.
김 코치에게 늘 ‘완벽주의자’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주는 신영철 우리카드 감독이 전력분석 담당이던 그에게 수석 자리를 맡긴 것은 보다 넓게 코트를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덕분에 김 코치는 15년 만에 선수 뒤(전력분석관석)가 아닌 옆(팀 벤치)에서 경기를 본다. 김 코치는 “아직도 수석코치 자리가 어색하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요즘에는 경기 전 인터뷰나 작전타임 때 감독님의 입 모양을 눈여겨보게 된다. 감독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분석관 시절에는 못했던 일이다. 가까이서 보니 새롭다. 그래서 여전히 코트에 있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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