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경기 시작 1시간 전, 양 팀이 선발 라인업을 교환하면 곧 전광판에 양 팀의 타순이 타율과 함께 뜬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홈 사직구장 전광판에는 올해부터 타율이 사라졌다. 그 자리는 OPS(출루율+장타율)가 채운다.
‘2020 신한은행 SOL KBO리그’ 시즌 초반을 달구고 있는 롯데의 올해 키워드는 ‘숫자’다. 그간 롯데는 데이터 활용에 취약한 팀이었다. 지난해 9월 부임한 성민규 단장은 곧장 R&D(Research and Development·데이터 분석) 팀을 신설했다.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 스카우트로 근무한 경험이 만든 선택이었다. 컵스는 데이터 전문가 테오 엡스타인 사장 영입으로 2016년 ‘염소의 저주’를 깨고 10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롯데도 R&D 팀 강화를 목표로 각종 첨단장비를 구입했고, 전문인력을 보강했다. 허문회 감독도 선임 과정에서 데이터 활용에 능한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프런트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선수가 바뀌지 않으면 변화는 어렵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10년 넘게 ‘타율’, ‘승수’의 중요성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타율보다 OPS’라는 인식을 심기가 쉽지 않았다. 전광판에서 타율을 과감히 삭제하고 미국야구계가 가장 주목하는 기록인 OPS를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넛지(nudge) 효과’다. 넛지는 팔꿈치로 쿡쿡 찌른다는 의미로, 사람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뜻한다. 도로에 그어진 주행안내선을 통해 진입로의 혼잡함을 줄이고 접촉사고를 30% 가까이 감소시킨 국토교통부의 시도가 대표적 사례다. ‘OPS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방적 소통이다. 볼넷을 골라도 타율은 그대로지만 OPS는 실시간으로 달라진다. 선수들은 전광판을 보며 ‘출루의 맛’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변화는 전광판 밖에서도 감지된다. 롯데는 퓨처스 팀(2군)의 청백전 고과를 독특한 방식으로 매겼다. 투수는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과 수비무관 평균자책점(FIP)으로, 야수는 OPS와 삼진율 등으로 가치를 평가받았다. 시즌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진다. 선수별로 기록 관련 세 가지 미션을 정한 뒤 선수와 코칭스태프, 프런트가 상의해 목표치를 정한다. 이를 달성할 경우 고과점수가 오른다. 이른바 ‘플레이어 플랜’이다. 선수마다 천편일률적인 기존 고과산정 시스템에서 벗어나 각자의 역할에 맡는 성적을 해내길 바라는 것이다.
허 감독의 철학도 프런트의 그림과 일치한다. 승리한 경기 뒤 승부처를 꼽아달라고 물으면 홈런이나 적시타 순간보다는 그 앞의 볼넷 장면을 이야기한다. “가고자 하는 방향을 선수단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