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NC 박석민은 12일 KT와의 경기에서 6-6으로 맞선 10회말 무릎을 꿇으면서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이 홈런은 이튿날 메이저리그(MLB)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MLB.com은 “타자가 무릎을 꿇은 채 홈런 타구를 바라보는 건 (끝내기 홈런) 장면을 더 멋지게 만들었다. 토니 바티스타, 아드리안 벨트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바티스타와 벨트레는 1990, 2000년대 MLB를 대표했던 거포들로 무릎 꿇고 홈런 치기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그 정도로 최근에 보기 힘든 명장면이 나왔다는 의미다.
5일 개막 이후 하루에 한 경기씩 미국 ESPN을 통해 생중계되는 KBO리그가 전 세계 야구팬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볼거리로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주요 스포츠 매체들이 KBO리그를 보도하고 있고, 흥미로운 하이라이트 영상들은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 ‘야구 본고장’의 인식 바꾼 한국산 ‘빠던 아트’
해외 야구팬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배트 플립(Bat Flip·배트 던지기)’으로 불리는 동작이다. 배트를 ‘빠따’로 부르기도 하는 한국에서는 빠따 던지기, 줄여서 ‘빠던’으로 불린다. 주로 홈런을 치면서 짜릿한 손맛을 본 타자들이 본능적으로 배트를 내던지는 동작이다.
MLB에서 빠던은 금기로 통한다. 상대 투수를 무시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가 빠던을 하면 다음 타석에서 옆구리로 날아드는 빈볼을 각오해야 한다. 상대 팀과 굳이 신경전을 벌여야 할 때를 제외하고 MLB에서 홈런을 친 타자들은 비교적 차분하게 베이스를 돈다.
하지만 KBO리그에서 이 빠던은 금기가 아니다. 홈런을 친 타자뿐 아니라 홈런 타구로 착각한 타자들의 본능적인 빠던 동작이 매일 쏟아진다. 2013년 공을 때린 뒤 홈런으로 착각한 전준우의 ‘김칫국’ 빠던은 미국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2015시즌 후 MLB로 진출했던 박병호는 기자회견에서 해외 취재진으로부터 ‘미국에서도 배트 플립을 할 거냐’는 질문을 제법 비중 있게 받았다. 2018시즌 KBO리그 복귀 뒤 홈런을 칠 때마다 빠던을 하고 있는 박병호는 미국에서는 이를 하지 않았다. ESPN은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달랐던 박병호의 홈런 이후 동작을 비교하기도 했다.
KBO리그가 개막과 함께 미국에 생중계가 된 뒤 가장 관심을 끈 것도 빠던이다. 개막일에는 삼성과 NC의 경기가 전파를 탔는데, 중계진은 이날 터진 3개의 홈런 가운데 마지막에 나온 NC 모창민(35)의 홈런에 큰 흥미를 드러냈다. 홈런을 친 모창민이 배트를 휙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중계진은 “와우, 시즌 1호 배트 플립이 나왔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KBO리그를 특집으로 소개한 ESPN은 “한국에서 배트 플립은 무례하기보다 행위 예술(Art)로 인식된다”는 설명을 붙였다. 올 시즌 KBO리그에서는 경기당 2개 이상의 홈런이 나오고 있다. 홈런 이후를 장식하는 한국산 ‘빠던 아트’는 금기로만 여겼던 해외 야구팬들의 시각도 보다 긍정적으로 바꾸고 있다.
● MLB와 다른 ‘KBO 스타일’에 주목
MLB의 수준은 단연 세계 최고다. KBO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톱스타들도 미국 진출을 바랄 정도로 ‘꿈의 무대’다. MLB 30개 구단에는 불같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과 괴물 같은 타자들이 즐비하다.
이런 MLB를 매일 접하던 미국인들이지만 KBO리그를 보면서 새로운 느낌을 갖는 것 같다. 미국의 시사잡지 디 애틀랜틱은 KBO리그를 다루며 “개막전에서 삼성 선발 백정현이 최고 구속 시속 90마일(약 144km)밖에 안 되는 공으로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활용하는 장면이나, 두산 정수빈 박건우가 배트 헤드로 툭 밀어 쳐서 내야 안타를 만드는 모습에서 그동안 등한시했던 부분들을 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MLB와는 다른 ‘KBO 스타일’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생중계 이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NC의 경우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주의 약자와 같다는 이유로 많은 노스캐롤라이나 지역 팬들을 확보하게 됐다. NC를 상징하는 색(감색)과 마스코트(공룡)까지 일치해 KBO리그 팀인 NC를 미국 야구팀처럼 여기는 미국 팬들도 나오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시를 연고로 하는 마이너리그 팀 더럼 불스는 공식 트위터 계정에 “이제부터 여기는 NC 다이노스의 팬 계정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현지 시민단체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지역번호 919와 초식공룡 트리케라톱스를 조합한 이미지를 제작해 NC에 “(NC의 공식 마스코트인 단디, 쎄리에 이어) 3번째 마스코트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에릭 테임즈(워싱턴), 메릴 켈리(애리조나), 조시 린드블럼(피츠버그) 등 KBO리그를 거쳐 MLB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KBO리그를 미국 야구팬들에게 홍보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인지도도 높여 가고 있다.
KBO리그에 대한 높은 관심은 ‘빅리그’를 노리는 한국 선수들에게 호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KBO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양현종(KIA), 타자 나성범(NC), 김하성(키움) 등이 올 시즌 이후 MLB 진출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를 아는 중계진은 해당 선수들이 카메라에 잡힐 때마다 ‘빅 픽처’를 시청자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MLB 스카우트는 “우리가 직접 경기장에 가서 선수들을 관찰하고 리포트를 작성해 구단에 보낸다. 그래도 (미국에 있는) 담당자들이 선수를 직접 보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에 중계되고 있는 KBO리그는 빅리그를 노리는 몇몇 선수들에게는 제대로 쇼케이스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초 미국 야구 통계 사이트 팬그래프닷컴은 예측 시스템인 ZiPS(SZymborski Projection System)를 통해 KBO리그 선수들의 MLB 성적표를 내놓기도 했다. 양현종은 16승 8패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할 거라는 전망을 내놨는데, 올 시즌을 앞두고 MLB에 진출한 김광현(세인트루이스·13승 10패 평균자책점 3.79 예상)의 예측보다 더 후하다.
● ‘K베이스볼’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지려면
한국 야구가 세계 야구팬들의 시선을 끌며 의도치 않은 질시도 받고 있다. 대만 롄허(聯合)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프로야구는 대만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막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한국 소식만 전하고 있다. 미국 팬들은 한국이 제일 먼저 야구를 시작했다고 오해하게 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본프로야구의 전설 장훈 씨는 “왜 이런 위험한 시기에 야구를 하나. 한국의 경우 결국 돈 때문인 것 같다”고 폄훼하기도 했다. 리그 개막 결정 시점에 하루 평균 10명 내외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는 등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던 한국의 상황을 간과한 것으로 부러움의 시선인 셈이다.
비록 무관중 경기이지만 중계 화면에 비친 야구장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장성호 KBSN 해설위원은 “코로나19가 진정되고 MLB가 개막하면 자연스럽게 관심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한국 야구가 전례 없는 좋은 기회를 맞았기에 이를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단에서는 해외 팬을 만족시킬 만한 콘텐츠 제공에 힘쓰고 한국야구위원회(KBO)도 사이트 영문 서비스 제공 등 그간 계획해 온 세계화 전략을 빠르게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MLB, KBO리그를 모두 경험한 김선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팬들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플레이도 결국 탄탄한 기본기에서 파생된다. 선수들이 기본기를 중시하고 상식적인 플레이를 꾸준히 보인다면 호기심으로 한국 야구를 지켜본 해외 야구 관계자와 팬들도 자신의 팀에 어울릴 만한 선수인지 생각하며 보다 진지하게, 계속 한국 야구를 바라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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