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새 성공신화 도전하는 ‘파파’ 박항서 “책임감과 부담 크지만…” [정윤철의 스포츠人]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3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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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두 배로 많아진 새해인 만큼 더 열심히 뛰어보려 합니다.”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시아 최강으로 이끈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62)은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새해를 시작하는 힘찬 각오를 밝혔다. 지난달 29일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귀국한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등이 열리지 못한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굵직한 대회들이 많이 예정돼 있다. 베트남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보니 책임감과 부담이 모두 커졌지만 ‘어차피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긍정적으로 이겨내려 한다”고 말했다.

2017년 10월부터 베트남 국가대표팀(A대표팀)과 22세 이하 대표팀을 모두 이끌고 있는 박 감독은 올해 베트남 축구 사상 최초의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노린다. 또한 10년 만의 왕좌 등극을 이뤄낸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2018년)과 60년 만의 우승을 차지했던 동남아시아(SEA)경기에서 타이틀 방어에 나선다.

베트남에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올해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에 도전한다. 동아일보DB
베트남에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올해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에 도전한다. 동아일보DB


● 아쉬운 2020년과 기대가 큰 2021년
―코로나19 사태 속에 베트남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베트남 정부의 강력한 방역 조치로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1일 기준 베트남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는 1515명) 베트남 프로축구 리그도 잠시 중단됐다가 재개되면서 경기장 별로 80% 이상의 관중을 입장시킨 가운데 경기가 열렸다. 덕분에 코치들과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력을 체크할 수 있었다.”

―A매치 등 실전이 적었던 것은 아쉬울 것 같다.

“자가격리 문제로 외국팀을 초청하거나, 우리가 해외로 나가 A매치를 치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지난달에 A대표팀과 22세 이하 대표팀의 자선 경기를 통해 선수들이 실전 감각을 쌓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선 경기는 지난해 박 감독이 치른 유일한 공식 경기였다. 이 경기는 지난해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베트남 이재민을 돕기 위해 성사된 ‘형님과 아우’의 이벤트 대결이었다. 양 팀은 두 차례 경기를 치렀는데 1차전은 A대표팀이 3-2로 승리했고, 2차전은 2-2로 비겼다.

―‘형제 대결’의 소득은 무엇이었나.

“새로 발탁한 선수들의 실력을 테스트해볼 수 있었다. 올해 많은 대회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새 얼굴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자선 경기라 긴장감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동생(22세 이하 대표팀)은 형(A대표팀)을 한번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게 있지 않나. 모두 열심히 뛰었다.”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이 3월 재개되는 가운데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은 G조 선두를 달리고 있다. 2차 예선 3경기가 남은 가운데 6월에는 신태용 감독(51)이 이끄는 인도네시아(G조 5위)와의 대결이 예정돼 있다. 2차 예선은 각 조(총 8개 조) 1위가 최종 예선으로 직행하며, 각 조 2위 중 성적 상위 4개국이 추가로 최종 예선에 합류한다. 박 감독은 11월에는 동남아시아(SEA) 경기, 12월에는 스즈키컵을 치른다.

―월드컵 예선에서 베트남은 새 역사에 도전 중이다.

“올해 여러 대회가 있지만 우선은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을 이뤄내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베트남이 아직까지 최종 예선에 진출한 적이 없는데 현재 조 1위를 달리고 있다 보니 베트남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월드컵 예선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와 맞붙는데….

“신 감독은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다. 축구계 선후배지만 그라운드에서는 각자 대표팀의 사령탑으로서 만나게 된다. 그동안의 친분과 사적인 감정은 잠시 잊고 최선을 다해 경기할 것이다.”


―왕좌를 지켜야 하는 SEA경기와 스즈키컵에 대한 부담은 없는지.

“과거에는 우리가 도전자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챔피언 자리를 지켜야하니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지난해 열렸어야 할 대회들(월드컵 예선 등)이 올해로 넘어와 할 일이 두 배가 됐지만 최선을 다해 이겨내겠다.”

● 베트남의 ‘파파(아빠)’ 박항서
박 감독은 막내 아들뻘인 선수들을 지도할 때 실수한 선수의 엉덩이를 툭 치거나,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꿀밤’을 때리기도 한다. 90분 경기를 마치고 지친 선수들의 발 마사지를 직접 해주고, 질책보다는 격려로 선수들 사기를 끌어 올린다. 따듯한 ‘파파(아빠) 리더십’으로 베트남을 사로잡은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소시지, 로컬 기업의 광고에 출연하는 등 베트남 한류를 이끌고 있다. 베트남인 부두이 뚱 씨는 “박 감독은 우리의 영웅이다. 승리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선수들을 진정으로 대하는 그를 우리는 ‘파파’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박항서 감독(오른쪽)은 질책보다는 격려로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파파 리더십’으로 베트남 선수들을 이끌고 있다. 사진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박 감독. 동아일보DB
박항서 감독(오른쪽)은 질책보다는 격려로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파파 리더십’으로 베트남 선수들을 이끌고 있다. 사진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박 감독. 동아일보DB


―베트남에서 감독님의 인기는 여전한 것 같다.

“인기라는 것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성적에 따라 언제든지 잊힐 수 있는 것이 감독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의 인기에 현혹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기는 한 순간이자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해내야 할 새로운 일에 집중하려 한다.”

―외국인 감독의 성공 조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은 성적과 결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다. 외국 감독을 선임하는 이유는 결과를 내기 위한 것이다.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낯선 문화와 언어 속에서도 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또한 축구협회, 미디어 등과의 관계도 잘 형성해야 한다.”

과거 박 감독은 베트남을 이끄는 자신의 지도 철학에 대해 선수들이 패배 의식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박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싸워야 한다” “이건 전쟁이다” 등 강렬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사령탑 자리가 주는 부담감을 어떻게 떨쳐내는지.

“한국인 코치들과 함께 외식을 나가 담소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국제대회 등 특별한 일정이 없는 경우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코치들과 골프를 즐기기도 한다.”

―핸디캡이 궁금하다.


“베트남 골프장의 전장이 긴 편이어서…. 핸디캡은 30이다. (통상 0부터 30까지의 핸디캡 가운데 숫자가 낮을수록 골프 실력이 좋다는 것을 뜻한다). 골프를 잘 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코치들하고 운동을 하고 서로 약 올리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이다.”

● 2002 한일월드컵 후배들과 손흥민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박 감독은 수석코치로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을 보좌해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뤄냈다. 베트남에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박 감독을 두고 국내 팬들은 쌀 주산지인 베트남의 히딩크라는 뜻에서 ‘쌀딩크’로 부른다. 한일월드컵 당시 그라운드를 누빈 선수들 가운데 지난해 김남일(44)과 설기현(42)이 각각 프로축구 K리그 성남과 경남의 감독으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52)가 울산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박 감독은 과거 K리그 전남과 상주 등의 지휘봉을 잡은 바 있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박항서 감독(왼쪽)은 수석코치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해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다. 동아일보DB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박항서 감독(왼쪽)은 수석코치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해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다. 동아일보DB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인 선수들이 이제는 감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선수와 지도자의 능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선수 시절에 여러 대회에서 겪은 좋은 경험을 잘 살린다면 감독으로서도 좋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생각한다. 해외의 선진 축구 이론을 많이 배웠다는 것도 젊은 지도자들의 장점이다. 어쩌면 내가 조언을 받아야할 입장일지도 모른다.”

―베테랑 감독님이 ‘초짜 감독’에게 배울 것이 있을까.

“젊은 친구들이라 팀 운영 등에 대한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현대 축구의 흐름을 빠르게 읽을 수 있다. 경험에서는 내가 앞설 수 있지만 전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축구에는 후배들이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다. 모두 유능한 지도자들인 만큼 서로 경쟁을 통해 더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도 틈틈이 국내 축구계 소식을 챙겨봤다. 특히 베트남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에서 최정상급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슈퍼 소니’ 손흥민(29)의 이야기가 나오면 어깨를 쭉 펴며 덩달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손흥민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손흥민은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하이라이트 영상 등을 통해 그가 골을 넣는 장면을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 축구인들도 손흥민의 활약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축구계 선배로서 정말 뿌듯하다.”

박 감독은 이번 달 말 베트남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월드컵 예선 준비에 돌입한다. 박 감독은 베트남 감독직을 1년 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해가 지날 때마다 성과는 추억이 됐고,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그에게는 베트남이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울 종착지다. 박 감독은 “축구감독으로서 베트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힘겨운 일정이 많은 2021년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극복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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