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이션이라는 개념을 확립하면서 전천후 선수도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선수 위치에 관한 규칙이 존재함으로써 각 팀은 확실히 더욱 유연하고 흥미로운 전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 국제배구연맹(FIVB) 경기 규칙
규칙을 제대로 적용한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제는 9인제 배구처럼 ‘로테이션 개념’이 없는 배구가 더 이상해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2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안방 팀 우리카드와 한국전력이 맞붙은 프로배구 2020~2021 V리그 남자부 경기처럼 ‘선수 위치에 관한 규칙’을 잘못 적용하면 엉뚱하게 피해를 보는 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로테이션이라는 개념은 뭐고, 선수 위치에 관한 규칙은 또 무엇일까요? 초보 배구 팬들께 도움을 드리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FIVB 경기 규칙 본문에는 로테이션(rotation)이라는 낱말이 총 15번 등장합니다. 그중 제일 먼저 이 낱말이 나올 때는 ‘taking turns to serve’(서브를 넣는 순서)라는 표현이 따라옵니다. 이어 7.3.1, 7.3.2를 통해 이 개념이 무엇인지 보충 설명합니다.
“각 팀 선발 라인업은 코트에서 선수들의 순환적인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며 해당 세트 동안에는 이 순서를 유지해야 한다.” ─ FIVB 경기 규칙 7.3.1
“매 세트 시작 전 각 팀 감독은 라인업 용지 또는 전자장치를 통해 선발 라인업을 제출해야 한다. (후략)” ─ FIVB 경기 규칙 7.3.2
이어서 7.3.5에 위치(positions)에 관한 규칙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코트에 있는 선수들 위치가 라인업 용지에 쓴 위치와 다를 경우 아래처럼 처리한다.” ─ FIVB 경기 규칙 7.3.5
그러니까 각 팀 감독은 라인업 용지에 선수들 위치를 적어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FIVB 경기 규칙 7.4.1은 선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네트 근처 선수 세 명은 전위 선수로 4번(전위 왼쪽), 3번(전위 중앙), 2번(전위 오른쪽) 위치에 자리한다. 나머지 선수 세 명은 후위 선수로 5번(후위 왼쪽), 6번(후위 중앙), 1번(후위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 FIVB 경기 규칙 7.4.1.1, 7.4.1.2
이 정의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자리는 서브 순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세트를 시작할 때 ①번 선수가 제일 먼저 서브를 넣고, 이어서 ②번 선수가 서브를 넣은 다음 … ⑥번 선수까지 서브를 넣고 나면 다시 ①번 선수가 서브를 넣는 겁니다.
그리고 서브를 넣는 선수(서버)가 바뀔 때마다 선수는 아래 그림처럼 자리를 한 칸씩 이동합니다.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냥 서버가 ①번 위치에 오도록 시계 방향으로 한 칸씩 이동하는 방식입니다. ‘선수 위치에 관한 규칙’은 기본적으로 서브 때 이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서버가 공을 때리는 순간 서버를 제외한 양 팀 선수는 로테이션 순서에 따라 자기 팀 코트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 FIVB 경기 규칙 7.4
만약 서브 순간 엉뚱한 위치에 있게 되면 ‘위치 반칙’ 그러니까 포지션 폴트(positional fault)를 저지르게 됩니다. 위치 반칙을 범하지 않으려면 아래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하면 됩니다.
먼저 후위 선수는 대응(corresponding) 전위 선수보다 센터라인 뒤쪽에 자리해야 합니다. 후위 왼쪽 선수는 전위 왼쪽 선수보다, 후위 중앙 선수는 전위 중앙 선수보다, 후위 오른쪽 선수는 전위 오른쪽 선수보다 뒤쪽에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전·후위 모두 왼쪽 선수는 중앙 선수보다, 중앙 선수는 오른쪽 선수보다 왼쪽에 자리해야 합니다.
이때 앞뒤, 좌우 기준를 평가하는 기준은 ‘발’입니다. 그냥 한 발 그것도 일부만 전후좌우에 자리 잡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후위 선수는 한쪽 발 일부라도 전위 선수보다 뒤에 있으면 되고, 마찬가지로 왼쪽 선수는 중앙 선수보다 한쪽 발 일부라도 왼쪽에 있으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규칙이 느슨하기 때문에 아래처럼 자리를 잡아도 포지션 폴트가 아닙니다.
①번 선수는 ②번 선수보다, ⑥번 선수는 ③번 선수보다 ⑤번 선수는 ④번 선수보다 뒤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후위는 ①번 - ⑥번 - ⑤번, 전위는 ②번 - ③번 - ④번 순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전력은 이날 1세트 16-16 상황에서 실제로 이렇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카드 알렉스가 서브를 넣는 순간 이렇게 공격 대형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포지션 폴트를 선언한 건 오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심판도 이 상황에서 헷갈릴 소지가 있기는 했습니다. 다른 팀 같으면 이런 로테이션 순서일 때는 ②번 자리에 있는 러셀(레프트)이 서브 리시브 라인에 합류하고 ③번 안요한(센터)이 빠지는 형태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전력은 러셀 대신 센터가 서브 리시브에 가담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형태와 다르게 섰습니다.
이때 한국전력이 포지션 폴트를 범했다고 잘못 지적한 건 최재효 부심이었습니다. FIVB 경기 규칙 24.3.2.2는 서브를 받는 팀(리시빙팀) 포지션 폴트는 부심이 판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서브를 넣는 팀(서빙팀) 포지션 폴트 여부는 주심 소관 사항입니다(FIVB 경기 규칙 23.3.2.3) 그래서 같은 세트 13-13 상황에서는 권대진 주심이 포지션 폴트를 선언해야 했습니다. ②번 자리에 있어야 할 신영석과 ③번 자리에 있어야 했던 황동일이 자리를 바꾼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포지션 폴트는 서버가 공을 때리는 순간을 기준으로 판정해야 합니다. 한국 프로배구에서는 서버가 공을 띄우면 미리 움직이는 선수도 많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 역시 규칙 위반입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김건태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본부장은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판정을 강화하고 싶다”고 사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현역 심판 시절 ‘코트의 포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 본부장은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순간 발목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카드는 이날 전적으로 포지션 폴트 오심 때문에 패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경기력을 선보인 게 사실. 그렇다고 해도 1세트 승패가 바뀌었다면 또 경기 분위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운용의 묘’가 아쉽습니다.
KOVO는 지난해 12월 12일 여자부 KGC인삼공사-현대건설 경기 3세트 도중 나온 네트터치 오심에 대해 “8월 10일 기술위원회에서 합의한 ‘리플레이를 선언하지 않는 스페셜 케이스’에 해당한다”면서 “경기 진행 중 네트 터치 등의 사유로 경기가 중단되어 비디오 판독을 통해 오심으로 판독이 된 경우, 해당 플레이가 누가 보더라도 플레이를 이어갈 상황이 아니고 아웃 오브 플레이가 되는 상태라면 리플레이를 진행하지 않고 득점 혹은 실점으로 인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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