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계의 유리천장 뚫었다 “나는 런던의 에이전트 레이디” [정윤철의 스포츠人]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3일 11시 00분


‘Burn the bridge(다리를 불태워라).’

영국의 관용 표현 중 하나로 군대가 진격할 때 퇴로로 쓸 수 있는 다리를 불태워버린다는 뜻이다. 진군 도중 맞닥뜨리게 갖가지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전진만 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다. 유럽 축구계의 높은 장벽을 뚫고 8년째 에이전트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김나나 카탈리나앤파트너스 스포츠그룹 대표(39)는 이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슈퍼 소니’ 손흥민(29)의 소속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과 맨체스터시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 이탈리아 세리에A의 AC 밀란 등 유명 클럽들을 클라이언트로 두고 있다. 김 대표는 “에이전트가 구단을 대리해 협상에 나설 때 두 번의 기회라는 것은 없다. 이미 되돌아갈 다리는 불태웠다는 심경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이유”라고 말했다. 유럽 축구시장에서 한국인 여성 에이전트로 살아가며 느낀 생각 등을 담은 책 ‘나는 런던의 에이전트 레이디’를 최근 출간한 김 대표는 현재 유소년 육성사업을 위해 한국에 머물고 있다. 경기 고양시의 한 카페에서 에이전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김나나 카탈리나 앤 파트너스 스포츠그룹 대표는 8년째 유럽 축구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다. 유럽 축구계의 유리 천장을 뚫은 그는 맨체스터시티(잉글랜드),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등 유명 구단들을 클라이언트로 두고 있다. 김나나 대표 제공
김나나 카탈리나 앤 파트너스 스포츠그룹 대표는 8년째 유럽 축구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다. 유럽 축구계의 유리 천장을 뚫은 그는 맨체스터시티(잉글랜드),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등 유명 구단들을 클라이언트로 두고 있다. 김나나 대표 제공


● 인생의 전환점이 된 맨시티와의 만남
대학교에서 서어서문학과 법학을 전공한 김 대표는 26살에 이탈리아로 넘어가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글로벌 마켓 컨설턴트로 일했다. 아시아 마켓에 관한 지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업의 해외 마켓 협상과 컨설팅에 집중하던 그는 2013년 EPL의 대표적 ‘부자 구단’ 맨체스터시티(맨시티)와의 만남을 계기로 축구계에 발을 내딛었다. 아시아 프로축구 구단 인수를 고심 중이던 맨시티의 글로벌 프로젝트에 합류한 것이다.

맨시티의 소유주는 아랍에미리트(UAE) 왕족인 셰이크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하얀이다. 그의 총자산은 35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맨시티를 인수한 만수르는 2조 원에 가까운 돈을 선수 영입에 투자해 초호화 선수단을 구성했다. 그런 만수르의 또 다른 목표는 세계 주요 도시에 자신이 소유한 축구 구단을 두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패션계에서 일하며 인연을 맺은 업계 관계자들이 아시아 구단 인수를 위해 전문가를 찾던 맨시티에 나를 추천했다. 맨시티는 아시아 문화와 시장 특성을 잘 알고 있고 유럽 사람들과 팀으로 일하는 데 문화적 어려움이 없는 나를 적임자로 여겼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맨시티와 손잡았다. 맨시티의 중국 내 인수 타깃 구단 설정 작업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함께 하며 축구 에이전트 생활을 시작했다.

에이전트 업무는 다양하다. 선수의 이적과 연봉 협상을 담당하는 ‘선수 에이전트’ 외에도 매년 수백 건의 상업 계약을 체결하는 구단의 대리인으로서 스폰서와 중계권, 라이선스 계약, 구단 인수합병 등을 담당하는 ‘구단 에이전트’가 있다. 김 대표는 구단의 상업계약 중 해외 협상을 담당하는 에이전트로 활동 중이다.

가장 큰 수입원은 대체로 계약 성사에 따른 수수료다. 부자 구단 맨시티의 보상은 어땠을까. 김 대표는 자신의 책에서 “과장을 살짝 보태자면 맨시티는 첫 거래 성사 후에 당장 은퇴해도 될 정도의 거액을 커미션으로 줬다. 한동안 맨시티 직원들이 나를 보면 ‘이미 은퇴해서 바하마 해변에 있는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축구계에 이제 막 뛰어든 아시아인 에이전트가 맨시티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유럽 축구계에 내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영국 런던에 사무실을 차린 이후 맨시티 외에도 여러 구단들과 함께 일을 하며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2016년에는 토트넘과 금호타이어의 파트너십 계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김나나 대표(오른쪽)가 2019년 이탈리아 명문 클럽 AC 밀란과 유소년 교육 관련 계약을 맺은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나나 대표 제공
김나나 대표(오른쪽)가 2019년 이탈리아 명문 클럽 AC 밀란과 유소년 교육 관련 계약을 맺은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나나 대표 제공


● “차별을 차별로 생각하지 말 것”


김 대표는 유럽 축구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인, 유럽인, 남자들로 구성된 ‘이너 서클’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유럽 주요 축구 리그에서 뛰는 아시아 출신 선수도 많지 않지만 비즈니스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더욱 적은 편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시아인 여성 에이전트로 살아가면서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을 받은 적은 없었을까. 김 대표는 “업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이고, 유럽에서 일하는 한국인이기에 내가 대단한 차별과 편견을 뚫고 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유럽 백인 남성 에이전트와 같은 프로필을 가졌다면 유럽 축구계에 내 자리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면서 “유럽 구단들이 아시아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선 상황에서 유럽 사람들에게 부족한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를 내가 갖고 있었기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무기 삼아 실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차별을 차별이라 여기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럽 축구 구단들은 내부 회의에서 김 대표를 지칭할 때 ‘에이전트 레이디’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에이전트 레이디는 도착했어?”, “그 에이전트 레이디가 원하는 건 뭐야?”라는 식이다.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성 에이전트가 업계에 드물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띈다는 것은 에이전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내 존재를 확실히 알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클라이언트에 대한 세심한 관리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항상 빨간색과 파란색 하이힐을 갖고 다닌다. 그는 “유니폼 등 팀 고유색이 파란색인 팀들은 빨간색 신발을 신은 사람이 자신들의 클럽 시설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손흥민의 소속팀인 토트넘의 경우 클럽하우스에서 라이벌 구단인 아스널의 상징색인 빨간색 옷을 입으면 안 된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사용하는 산타클로스 모자도 빨간색이 아니라 토트넘의 상징인 파란색이다. 김 대표는 자칫 구단이 예민해할 수 있는 문제를 알아서 조심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자신과 일하고 있는 두 개 구단이 맞붙는 경기에 초청을 받았는데 한 팀은 빨간색 유니폼, 다른 팀은 파란색 유니폼을 입는다면 김 대표는 어떤 선택을 할까. 김 대표는 “그럴 때는 고민 끝에 장례식이 아닌데도 드레스까지 검은색을 입고 가게 된다”고 말했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협상에 나서는 에이전트에게는 체력도 중요하다. 체력 관리를 위해 김 대표도 여러 운동을 배웠다. 그는 “이 업계에는 선수 출신의 에이전트들이 너무 많다. 체력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승마와 테니스, 복싱, 스키 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레알 마드리드 아카데미

현재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국 선수 중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손흥민이다. 토트넘에서 6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손흥민은 이번 시즌 리그에서 13골을 넣어 득점 공동 4위에 자리해 있다. 김 대표는 “두세 시즌 전부터 유럽 축구계에서 ‘손(Son)’이라고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손흥민은 톱 레벨 선수가 됐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와 유벤투스(이탈리아) 등 유럽 빅 클럽들이 손흥민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2의 손흥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많은 한국 유망주들이 유럽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김 대표는 “자국 내 명문 클럽이 유럽 진출의 교두보가 되는 브라질 등과 달리 한국에는 정형화된 유럽 진출 루트가 없다. 외국인 스카우트들 입장에서는 한국인 유망주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포인트가 없기 때문에 한국 출장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한국 유소년 선수들의 해외 진출 확대를 위해 자신의 클라이언트인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한국에 축구아카데미를 세울 계획이다. 경북 문경 글로벌선진학교에 개설될 예정인 아카데미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글로벌 아카데미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친 경험이 풍부하고 유럽축구연맹(UEFA) 자격증을 보유한 외국인 코치가 상주하며 교육을 진행한다. 또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수그러들면 스페인에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훈련 시설에서 전지 훈련을 진행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한 해외 구단 관계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아카데미 선수들을 노출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나나 대표는 자신의 클라이언트인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한국에 축구 아카데미를 세울 계획이다. 아카데미가 개설될 경북 문경 글로벌선진학교의 모습. 김나나 대표 제공
김나나 대표는 자신의 클라이언트인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한국에 축구 아카데미를 세울 계획이다. 아카데미가 개설될 경북 문경 글로벌선진학교의 모습. 김나나 대표 제공


구단 계약 업무 등 여러 가지 일을 수행 중인 김 대표가 유소년 육성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유소년에 대한 투자는 에이전트 업계의 생명”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그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슈퍼 에이전트 A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너처럼 세계적 선수 B를 대리하려면 아침에 변을 봤는지 여부까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게 사실이야?”

A의 대답은 이랬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나는 사실 B한테 관심이 없어. 그 선수는 이미 완성형이고 내 미래는 앞으로 발굴할 유망주와 함께하는 것이야. 내 관심사는 언제나 유망주를 찾아내 데뷔시키는 거야.”

김 대표는 “많은 에이전트들이 정년이 없는 이 직업에 은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면서 “이 업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수가 꾸준히 배급돼야 하므로 빅 클럽과 일하는 에이전트들은 유망주 발굴과 육성을 의무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양=정윤철기자 trig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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