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최고라고 하면 런던 올림픽 (함께 나갔던) 언니들한테 혼나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지금이 최고인 것 같아요.”
한국과 터키의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배구 8강전이 열린 4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 2시간 17분의 풀세트 혈투 끝에 3-2로 이겨 준결승 티켓을 따낸 주장 김연경(33)은 승리의 공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원 팀 “어떤 선수가 들어와도 자기 경기한다”
김연경은 “잠깐 들어오는 선수도 언제든지 자신이 들어와서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준비한다. 결국 그런 게 ‘원 팀’이 된 원동력”이라며 동료들을 향한 믿음을 나타냈다. 이날 경기에선 교체선수 포함 12명이 전원 코트에 투입돼 다함께 승리의 디딤돌을 놨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도 ‘원 팀’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라바리니 감독은 “오늘 경기는 100점 만점에 5000점이다. 선수들이 집중을 잘했고, 그들의 의지가 차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팀워크를 세우기까진 쉽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1년 연기된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김연경은 11년 만에 국내에 복귀했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대표팀 주전이던 쌍둥이 이재영, 이다영 자매(이상 25)는 ‘학교폭력’ 논란으로 코트를 떠났다. 4월 대표팀 소집 이후에는 연일 강행군이었다. 5, 6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는 16팀 중 15위에 그쳤다. 귀국 후 자가 격리를 거쳐 경남 하동군에서 코호트(동일 집단격리) 훈련을 했다. 4, 5월 결혼식을 올린 양효진(32), 표승주(29)는 신혼의 단꿈도 뒤로 미뤄야 했다. 선수들 모두 3, 4개월을 외부와 차단된 채 코트 위에서 배구공만 바라봐야 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무대 올림픽에 선다는 자부심이 선수들을 부채질했다. 특히 올림픽 고별 무대에 오르는 주장 김연경, 김수지(34), 양효진 등 베테랑들과 함께한다는 책임감도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했다. 어린 선수들은 경기마다 “언니들의 마지막 올림픽인만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원 톱 “김연경은 10억 중 단 하나의 스타”
김연경은 코트 안에서 노련하게 ‘원 팀’을 이끌었다. 3세트 후반과 4세트 초반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이 나오자 김연경은 강하게 항의했다. 결국 레드카드를 받아 1점을 내주긴 했지만 동료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김연경은 “1세트부터 판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상대 팀이 항의하면 꼭 다음에 (휘슬을) 불어줬다. 항의하면 반응을 보이는 심판이라 생각했다”며 “(3, 4세트) 그 때는 우리도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후배들을 모았을 때 (심판) 욕도 하고 그랬다”고 웃었다.
여자 배구 최고의 무대로 꼽히는 터키리그에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뛴 김연경의 노하우도 도움이 됐다. 이날 맞붙은 터키의 주장 에다 에르뎀(34), 멜리하 이스마일로글루(28) 등은 과거 터키 페네르바흐체에서 한솥밥을 먹은 옛 동료다. 에르뎀은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네덜란드 사령탑으로 한국을 8강에서 탈락시킨 조반니 귀데티 터키 감독에게 설욕도 성공했다. 과거 김연경에게 “(배구계의) 리오넬 메시 이상의 선수”라고 극찬했던 감독이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우리는 말하고 또 말했다. 김연경은 10억 중 단 한 명이라고”란 글을 적었다. 물론 ‘원톱’ 김연경이 있기에 ‘원팀’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바리니 감독은 “위대한 선수가 있고, 위대한 리더가 있는데 김연경은 둘 다다. 모든 선수들이 김연경을 믿고, 김연경은 선수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자리까지 팀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배구의 신’ 김연경도 경기 뒤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한민국배구협회가 이날 SNS에 공개한 영상 속에서 김연경은 경기장 한쪽에 앉아 물을 마시다 고개를 저으며 이같이 말했다. “아따 죽겄다잉. 한 경기 한 경기가 피가 말린다잉.”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김연경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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