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태권도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 ‘노 골드’에 그쳤다. 태권도 종주국이기에 금메달 없는 올림픽은 수모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노 메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등 태극전사들의 땀흘리는 ‘과정’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하고 승자에게 ‘엄지 척’을 건네며 패자의 품격을 보인 이다빈(25·서울시청)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올림픽 태권도 종목이 끝나고 약 한달 여. 이다빈은 “부모님이 계시는 집(울산)에서 한 일주일 쉬고 회사가 있는 서울로 와서 친구들 만나서 좋아하는 삼겹살을 원 없이 먹으며 재충전했다”며 웃었다.
2014년, 2018년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딴 아시아 최강이지만 이번 도쿄 올림픽은 이다빈에게는 처음 나선 올림픽이었다. 이다빈은 “첫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어 기쁘다. 하지만 ‘부상이 없었다면…’이라는 아쉬움도 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5년 만에 열린 이번 올림픽은 이다빈에게는 하마터면 포기할 뻔한 올림픽이다. 올림픽 준비가 한창인 올해 1월 왼 발목 부상으로 뼛조각제거 및 인대접합 수술을 했다. 순조롭게 재활을 거친다면 큰 문제는 아닐 정도였지만 혈관 문제로 약 100일 뒤인 4월 말 재수술을 했다. 이다빈은 “올림픽을 위해 4년을 달렸는데, 연기돼서 ‘1년 더’라고 할 때 허무했고 마음을 다잡는데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이런 일까지 겹쳐 심적으로 정말 힘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재활이 끝난 5월 말, 올림픽까지 두 달도 안 남은 때다. 다시 출발선에 선 거나 마찬가지인 이다빈에게 의료진은 ‘다음을 기약하자’며 올림픽 출전을 만류했지만 그는 더 독한 마음을 먹기로 했다. 이다빈의 말투를 그대로 옮기면 하루를 “새벽오전오후야간”으로 쪼갠 듯 안 쪼갠 듯 나눠 하루 종일 훈련에 중독 된 사람처럼 훈련했다.
“누군가는 간절히 원해도 못 얻은 올림픽 출전권이잖아요. 새벽에 눈이 안 떠지려고 할 때도 그걸 생각하면서 힘들어도 일어났어요. 지칠 때면 ‘나약한 생각을 했다니…’ 하면서 그날 더 열심히 훈련하고요. 하하.”
이다빈의 올림픽 출전 2주 전인 7월 13일, 그가 매일 쓴다는 훈련일지에는 오전, 오후 등 시간별로 훈련한 세부적인 내용과 훈련을 하고 느낀 점 등이 공책 1페이지 분량으로 빽빽히 적혀있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모습으로 ‘파이터’라는 별명이 붙은 이다빈답게 손 글씨로 또박또박 쓴 ‘더 강하게’, ‘악착같이’, ‘공격적으로’ 같은 단어도 눈에 띈다.
올림픽 무대에 선 이다빈은 그의 부상을 몰랐던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일만큼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67kg 초과급에서 ‘세계최강’으로 평가받는 비안카 위크던(29·영국)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위크던은 2018년 타오위안 월드그랑프리 결선에서 이다빈에게 얼굴 돌려차기 공격을 맞고 다운당했다. 이후 이다빈만 만나면 최강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 이다빈에게 ‘비안카 저격수’란 별명이 붙었다.
올림픽 준결승에서 위크던을 상대한 이다빈은 22-24로 뒤진 경기종료 직전 위크던의 머리에 발차기(3점)을 적중시키는 ‘버저비터’로 결선에 올랐다. 올림픽 2연패를 노렸던 위크던의 철저한 대비가 무색해진 순간이다. 이다빈은 “2017년 (위크던을) 처음 만나 그해에 두 번 다 지고, 이듬해 두 번 만나서 모두 이겼다. 누가 부담을 덜 안고 싸우느냐가 관건 같았는데, 내가 덜 긴장했던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결선에서 밀리카 만디치(30·세르비아)에게 패하고 상대에게 엄지를 치켜세운 장면에 대해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는데, 상대는 어땠을까 하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더 좋은 성적을 냈다면 그건 당연히 축하해줄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첫 올림픽은 이제 ‘과거’가 됐다. 그러나 아쉬움도 남기에 목표는 더 또렷해진다. ‘월드스타’ 이대훈(29)만 달성한 ‘아시아경기 3연패’와 이대훈이 끝내 이루지 못한 올림픽 금메달이다. 이미 세계선수권(2019년), 아시아경기(2014, 2018년), 아시아선수권(2016, 2018년)을 석권한 이다빈은 올림픽 금메달만 추가하면 주요 4개 대회 우승을 지칭하는 ‘그랜드슬램’도 달성한다. 배려와 겸손이 몸에 밴 듯 경기 상대나 다른 사람을 치켜세우는 말을 많이 하던 이다빈도 이 ‘목표’에서만큼은 배려가 없다.
“누가 금메달을 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들 열심히 이번 올림픽을 준비했는데 결과가 아쉬웠어요. 다음 올림픽에서 저부터 그 아쉬움을 털어내겠습니다. 10월 전국체육대회, 내년 세계선수권, 아시아경기 등 중요한 관문들이 있어요. 차근차근 풀어가며 3년 뒤 그날, 가장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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