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유희관(36)이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나면서 13년 동안 몸 담았던 두산 베어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희관은 20일 오후 서울 잠실구장에서 진행된 은퇴 기자회견에서 “많이 부족했던 나를 아껴준 감독님들과 코치님들, 가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들과 팬들에게 감사하다”며 “인생의 3분의2를 바친 야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된 나는 참 행복한 선수”라며 눈물을 훔쳤다.
유희관은 지난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6라운드 42순위로 두산에 지명돼 줄곧 두산 유니폼을 입은 프랜차이즈 스타다. KBO리그에서 가장 느린 공을 던지지만, 뛰어난 제구로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유희관에게 ‘느림의 미학’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프로 입단 후 4년째인 2013년부터 선발 한 축을 맡은 유희관은 두산 왕조를 이끌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 3회(2015·2016·2019년)에 기여했다. 13년 동안 유희관은 KBO리그 통산 281경기에 101승 69패 777탈삼진 평균자책점 4.58의 성적을 남겼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고, 두산 좌완 최초로 100승이라는 금자탑도 세웠다.
유희관은 “느림의 미학이라는 표현은 나를 대표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도 ‘프로에서 느린 공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게 노력한 부분이 성과를 냈다”며 “좋은 팀을 만나서 편견을 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2013년 5월 4일 LG 트윈스전에서 더스틴 니퍼트의 대체 선발로 등판해 거둔 첫 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1’이라는 숫자가 있었기 때문에 ‘101’이라는 숫자가 될 수 있었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15년 첫 우승했을 때”라고 13년의 선수 생활을 돌아봤다.
일각에서는 유희관이 올겨울 구단과의 연봉 협상이 지지부진해 은퇴를 결심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유희관은 “전혀 아니다. 지난해 부진하면서 2군에 머문 시간이 많았다. 특히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제외돼 후배들이 뛰는 경기를 보면서 ‘이제 내가 물러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했고,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많이 사라졌다. 팀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좋은 투수들이 성장하는데 내가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현역 시절부터 기자회견과 인터뷰 등에서 화려한 언변을 자랑한 유희관의 행보는 벌써부터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다. 선수로 뛸 때도 유희관은 방송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한 바 있다.
유희관은 “방송 3사에서 해설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 내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다. 해설위원, 방송인, 코치 등 여러 방향으로 생각 중”이라며 “역할에 상관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유희관은 “그라운드에서 항상 유쾌했던 선수, 팬들과 두산을 가장 생각하고 사랑했던 선수로 기억에 남고 싶다”며 “앞으로 팬들이 두산 구단을 사랑해주고 프로야구를 더 많이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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