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경기 일산의 한 당구장에 34세 청년이 불쑥 찾아왔다. 사장에게 자신을 당구 선수라고 소개한 그는 구석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 분과 당구를 쳐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저 분’은 당시 국내 랭킹 1위 김경률(1980~2015)이 홀로 훈련하고 있었다. 전북 전주시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을 달려온 그는 첫 경기서 34-40, 두 번째 경기서도 33-40으로 패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두 게임에서 모두 졌지만 청년은 얼굴 가득 미소를 뜬 채 떠났다. 이 ‘청년’은 2011년 당구 선수로 등록한 늦깎이 선수 김임권(42)이었다. 선수로서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하던 김임권은 ‘우리나라에서 당구를 잘 치는 선수와 붙어 보고 노력해서 이길 자신이 있으면 계속해보자’고 마음먹었다. 2전 전패에도 김임권이 웃을 수 있던 건 언젠가 김경률을 넘어설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김경률을 당차게 찾아갔던 무명 선수 김임권은 8년이 지난 지금도 거침이 없었다. 이달 4일 자신의 첫 프로당구(PBA) 첫 결승 무대였던 웰컴저축은행 웰뱅 PBA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상금 랭킹 1위 프레드릭 쿠드롱(54·벨기에·웰컴저축은행)을 풀세트까지 몰아붙였다. PBA 최다(5회) 우승자인 쿠드롱을 결승전에서 풀세트까지 끌고 간 건 김임권이 유일하다.
원래 김임권은 당구와는 별다른 연이 없었다. 스키선수였던 형 김태영 씨(53)를 따라 고등학생 때부터 스키를 배워 10년 넘게 스키 강사, 스키 장비 판매자로 일했다. 취미로 배운 당구에 재미를 붙인 뒤 함께 당구장에 다니던 친구들이 “선수 한번 해보라”고 권유하면서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김임권은 “당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스키 강사 경험이 큰 자산이 됐다. 스키를 하며 하체 근육을 단련한 덕에 공을 칠 때 늘 서있어야 하는 당구에서도 경기력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며 “다만 예민한 성격은 극복해야 한다. 연습 때는 잘하다가도 실제 경기가 열리는 장소나 조명에 변화가 생기면 집중력이 흐려진다. 최근에는 경기 외적인 요소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당구대만 응시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김임권이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데도 예민한 성격이 영향을 끼쳤다. PBA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즌 그의 최고 성적은 17위에 불과했다. 128강, 64강에서 4인 1조 서바이벌 형식으로 경기를 진행하면서 신경 쓸 요소가 많아 경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반면 128강부터 한 사람씩 맞붙는 세트제로 바뀐 이번 시즌에는 성적이 급상승했다.
왕중왕전 성격의 월드챔피언십(19일)을 앞둔 그의 목표는 우승이다. 지난 대회에서는 쿠드롱에게 우승 트로피를 내줬지만 “노력하면 다음에는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를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워보인다. 8년 전 김경률에게 진 뒤 자신감을 얻었던 김임권은 이후 김경률과 두 번 만나 두 번 모두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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