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선 박미희 전 흥국생명 감독(59)은 이런 차림으로 촬영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며 자꾸 민망해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유독 가벼워보였다. 지난 8년간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내야 했던 승부의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난 여유가 느껴졌다. 29일 서울 광진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박 감독은 “8년이라는 시간이 한 장면처럼 쓱 지나간 것 같다. 아쉬움도 남지만 잘 버텨온 것 같다. 스스로 ‘장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 때 감독들의 무덤으로 불렸던 흥국생명에 2014년 부임한 박 감독은 구단 역사상(프로 출범 후) 가장 긴 8년 간 사령탑을 맡았다. V리그에 많은 자취도 남겼다. 2016~2017시즌에는 정규리그 우승, 2018~2019시즌에는 통합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모두 국내 4대 프로스포츠 사상 여성 감독으로는 첫 쾌거다.
늘 이름 앞에 ‘여성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박 감독은 “당장 V리그에서 여성 감독이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또 누군가가 이어갈 것. 안 그래도 감독에서 물러나며 (여자배구 은퇴) 국가대표 단톡방에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후배들에게 ‘준비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말했다.
8년의 시간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단연 2018~2019시즌 통합우승 순간이다. 실제로 박 감독은 이날 감독 시절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을 들고 와달라는 요청에 통합 우승 챔피언 반지를 꺼내오기도 했다. 물론 이에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많았다. 박 감독은 “고등학교 경기를 보러갈 때도 특히 행복했다. 프로 팀에서 보러 왔다는 이야기에 눈빛이 달라지던 선수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린 선수들이 꼭 우리 팀이 아니더라도 프로에 와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했다”고 말했다.
배구 발전을 위한 고언을 남기기도 했다. 박 감독은 “선수들에 대한 대우나 환경은 좋아졌지만 지도자 역시 리그의 자산이라는 인식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적어도 계약 기간만큼은 감독의 역할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점차 열악해지는 선수 풀을 개선하기 위해 유소년 교육 활성화 등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8년만의 휴식을 얻게 된 박 감독은 당분간 감독 생활을 하면서 고마웠던 사람들을 하나 둘 찾아 감사의 뜻을 전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부족했던 가족과의 시간을 충실히 보낼 생각이다. 다음달에는 남편과 제주도 여행을 떠난다. 최근 감독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에게 가족들은 집에 ‘금의환향’이라고 쓴 현수막을 내걸며 환영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감독 자리에선 물러나지만 ‘배구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배구 코트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들을 고민해 볼 생각이다. 아직 에너지가 넘친다”는 박 감독의 말이 벌써부터 다음 도전을 기대하게 했다. ‘코트 위의 여우(박 감독의 현역 시절 별명)’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코트에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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