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처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은 이들은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는 한다. 박지애 씨(56)는 이런 진단을 받은 적이 없는데도 같은 습관이 붙었다. 선천적 자폐성 발달 장애인인 아들 이승민(25)이 학창 시절 골프 대회에 나갈 때마다 유독 경기 진행이 더뎌 생긴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언제까지 골프를 시킬 거냐”는 핀잔에 달리 대답할 말도 없었다.
아버지 일을 따라 미국에 살던 어린 시절 이승민은 늘 코에 흙이 묻어 있는 아이였다. 뒷마당에서 잔디를 한 움큼 뽑아 냄새를 맡는 버릇 때문이었다. 이승민은 냄새만 맡아도 잔디 종류를 알아맞히는 ‘능력자’였다. 이승민이 잔디를 사랑하게 만든 건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7)였다. 또래보다 집중력이 떨어졌던 이승민은 TV에 우즈가 나올 때는 화면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승민은 “잔디 위로 공이 ‘슈웅∼’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이승민이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건 한국으로 돌아온 중1 때였다. 박 씨는 “나 이거 하고 싶어”라는 아들의 일곱 글자 말에서 희망을 찾기로 했다. 이승민은 배우는 속도는 느리지만 한번 배운 건 쉽게 잊지 않는 선수였다. 그리고 2017년 발달 장애 선수로는 처음으로 한국프로골프(KPGA) 정회원 자격을 따냈다. 이번에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아들의 일곱 글자가 밤새도록 박 씨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이듬해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에서 컷 통과에 성공하면서 생애 첫 상금 189만 원을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프로 선수가 된 뒤로 “우즈와 마스터스에서 함께 플레이하고 싶다”는 꿈을 꾸던 이승민은 20일 ‘대형 사고’를 쳤다. 미국골프협회(USGA)가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 리조트에서 개최한 ‘US 어댑티브 오픈’ 초대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이 대회는 장애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코스에서 3라운드 54홀 경기를 각각 진행한 다음 순위를 가린다. 이승민은 펠릭스 노르만(25·스웨덴)과 똑같이 3언더파로 경기를 마친 뒤 연장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노르만도 발달 장애인이다.
이승민은 어릴 때부터 ‘느리다’고 놀림 받았지만 우승 비결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스피드’를 앞세워 금메달을 딴 박상영(27·펜싱)과 다르지 않았다. 이승민은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여섯 번 외쳤더니 정말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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