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대사다. 자폐 스펙트럼을 앓는 변호사 우영우는 승소를 위해 거짓을 방관한 데 대해 뒤늦게 자책한다.
현기증 날 만큼 훨훨 날아오르다 하루아침에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골프스타 윤이나(19)도 비슷한 심정 아닐까. 만약 딱 한 번 ‘멀리건 찬스’를 쓸 수 있다면 아마 그날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다. 오구(誤球) 플레이 늑장 신고로 무기한 투어 활동 중단을 선언한 윤이나 파문이 필드를 강타하고 있다.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에 뛰어든 신인으로 300야드 장타에 첫 우승까지 거머쥐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윤이나. 하지만 부정행위 한 방에 그를 향한 시선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부모, 코치, 캐디 등 관련된 등장인물이 늘어나면서 진실공방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카더라’ 수준의 루머가 담긴 ‘지라시’(사설정보지)까지 등장했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시작은 6월 16일 충북 진천군 레인보우힐스CC에서 열린 한국여자오픈 1라운드 15번 홀(파4)에서였다. 윤이나의 티샷은 페어웨이 오른쪽, 풀이 무성한 러프에 떨어졌다. 풀숲에서 찾은 공으로 플레이를 속개했으나 그린에 올랐을 때 자신의 공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는 게 윤이나 측 해명이다. 만약 홀아웃을 한 뒤 경기위원에게 이 사실을 자백했다면 2벌타를 받고 매듭지을 수 있었다. 오구 플레이 사실은 윤이나가 해당 홀 그린에 올랐을 때 캐디, 코치, 부모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로잡지 않았다.
오구 플레이 한 달 뒤에야 자진 신고
그린에 가서야 다른 공을 쳤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대목도 석연치 않다. 대회를 주관한 대한골프협회(KGA) 경기위원 A 씨는 “세컨드 샷을 하기 전 당연히 자기 공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어야 한다. 로스트 볼 가능성에 따른 프로비저널 볼(잠정구) 선언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이나는 1라운드를 4오버파 76타로 마쳤다. 공동 116위. 예상 컷 라인 이븐파와는 4타 차였다. 이때라도 신고했다면 실격 처분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대로 넘어갔다. 컷 탈락 가능성이 있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나, 그냥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는 관측이 나온다.
캐디가 2벌타나 실격에 대해 선수에게 설명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캐디가 플레이를 계속하라며 문제의 볼을 집어던졌다는 소문도 나온다. 코치 역시 팔짱만 낀 채 은폐를 묵인했다는 증언도 있다. 다른 선수의 부모와 지도자들까지 가세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윤이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빨리 판단이 서지 않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플레이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2라운드에 계속 나선 윤이나는 중간 합계 2오버파를 기록해 1타 차로 컷 탈락했다. 조용히 묻히는 줄 알았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 골프 관계자는 “윤이나가 한국여자오픈 당시 캐디를 다음 대회인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이 끝난 뒤 교체했다. 결별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는데 그 후 오구 플레이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됐다”고 전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윤이나 매니지먼트업체는 사건 발생 한 달 남짓 뒤인 7월 15일 KGA에 자진 신고했다. KLPGA투어 에버콜라겐 퀸즈크라운 2라운드가 열린 날이다. 전날 1라운드에서 윤이나는 7언더파 65타를 몰아쳐 단독 선두에 나선 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달성하는 최고의 순간을 맞는 듯했으나 오히려 빛바랜 결과가 됐다.
KGA는 7월 20일 윤이나의 한국여자오픈 성적을 컷 탈락에서 실격으로 변경했다. 윤이나는 KLPGA 상반기 마지막 대회인 호반 서울신문 위민스 클래식을 공동 15위로 마감한 뒤 다음 날인 25일 무기한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KGA는 스포츠공정위원회를 열어 윤이나의 징계 수위를 결정할 계획임을 밝혔다. KGA 관계자는 “섣부른 예단은 경계하고 있다. 경중을 떠나 본인이 평생 떠안고 갈 멍에가 될 것이다. 사회봉사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KGA의 징계가 확정되면 KLPGA투어 측도 이번 사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갈 전망이다.
여론은 엇갈리고 있다. 한 골프용품업체 팀장은 “그 행위 자체는 분명 잘못됐다. 어린 선수가 순간적 판단이 흔들릴 때 옆에서 조언을 잘해줬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크다”고 말했다. 한 TV 해설위원은 “선수 생명 운운하는 건 지나치다. 선수가 원인 제공을 했지만, 처리 과정에서 어른들의 미숙함이 일을 훨씬 키운 측면을 봐야 한다”고 신중론을 펼쳤다.
대한골프협회 징계 수위 결정 예정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도 있다. 한 레슨 프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들 쉬쉬하고 있었을 뿐이다. 일벌백계를 통해 근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과문에서 윤이나도 밝혔듯, 변명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데다, 한 달 가까이 진정성 있는 사과조차 없이 감추기에 급급한 인상을 준 것에 팬들은 분노하고 있다. 이제라도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이 절실해 보이는 이유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만 보이던 한국 여자골프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1998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맨발 투혼 우승을 계기로 한국 여자골프는 고도성장을 거듭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제2의 박세리’를 꿈꾸는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골프장으로 향하는 어린 선수가 쏟아졌다. 골프선수로 키우려면 연간 수억 원 비용이 들다 보니 실패하면 가정경제가 흔들리는 경우도 많았다. 아마추어 국가대표 선발은 하늘의 별 따기에 비유된다. 성공을 향해 올인하고 스코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은 부작용을 양산했다.
국내 중고교 골프대회는 선수의 부모들이 코스에 들어갈 수 없다. 일부 극성스러운 부모가 OB 구역 또는 해저드에 떨어진 자식의 공을 발로 차거나 집어던지는 등 룰 위반 사례가 심심치 않게 불거진 탓이다. 고교 골프 유망주 중에는 일반 고교를 그만두고 방송통신고로 전학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출석 일수나 주말리그 등 교육 당국의 일방통행식 학교 체육 정책으로는 골프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KLPGA투어에서도 볼썽사나운 장면이 속출하곤 한다. 특히 선수들의 룰 위반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최근에는 선수 부모끼리 대회장에서 관전 매너를 놓고 욕설을 주고받다 몸싸움까지 벌여 출입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한국만의 독특한 열성적인 팬덤 문화로 인해 일부 팬은 상대 선수의 플레이를 방해하거나 악성 댓글을 올리기도 한다.
시인 윤동주는 시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라며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고 했다.
‘윤이 나다’에서 이름을 따온 윤이나에게 윤과 녹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라도 참회의 심정으로 한국 여자골프의 얼룩을 지워야 하지 않을까. 그 일이 한두 사람만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노력해야 ‘제2의 윤이나’를 막을 수 있다.
김종석 부장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동아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한 골프 전문기자다. 1998년부터 골프를 담당했고 농구, 야구, 테니스, 배드민턴 등 주요 종목을 두루 취재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