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KBO)는 출범 40주년을 맞아 프로야구를 빛낸 레전드 40명을 선정해 4명씩 10주에 걸쳐 발표하고 있다. KBO 경기운영위원과 단장, 감독, 선수, 기자 등 162명의 전문가 투표(80%)와 팬 투표(20%)를 합산해 뽑았다. 현역 선수는 후보에서 제외돼 류현진 오승환 이대호 등은 은퇴 후를 기약해야 한다. KBO리그 성적만 대상이어서 박찬호 김병현 추신수 등은 177명 후보군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반면 유일한 외국인 100승 투수 더스틴 니퍼트는 최종 33위에 랭크됐다.
29일까지 28명이 발표된 40주년 레전드 기획은 나름 신선하다. 새로운 시도로 팬들의 관심을 모을 만하다. 별도 제작한 홈페이지 초기 화면은 텍스트 설명은 부족해도 시원한 동영상과 그래픽으로 채워져 보기 좋다. 1위부터 40위까지 순위가 매겨져 있으니 수포츠 애독자에겐 좋은 안주거리다.
● 선동열이냐, 최동원이냐
야구팬의 단골 화두인 역대 최고 투수와 타자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마침 최다 득표 4인방은 1위 선동열, 2위 최동원, 3위 이종범, 4위 이승엽으로 투수 2명, 타자 2명이다. 전문가 점수에서 최동원이 80점 만점을 받아 선동열(79.49점)을 앞선 게 눈길을 끈다. 그러나 팬 점수에서 9.99점 대 11.56점으로 제법 차이가 나 순위가 역전됐다. 이승엽도 전문가 점수에선 76.41점으로 이종범과 타이를 이뤘지만 팬 점수에서 10.14점 대 10.90점으로 뒤져 4위로 밀렸다. 팬 점수만 보면 11년 전 고인이 된 최동원은 4명 중 꼴찌다. 팬 투표야 현재의 인기도를 반영하는 것이니 넘어가자. 그러나 전문가 점수는 유감이다.
최동원은 선동열보다 나이로는 5년, 학번으로는 3년 선배다. 최동원이 1년 늦게, 선동열이 1년 빨리 대학에 진학했다. 그럼에도 둘은 거의 동시대에 활약했다. 비교할 때 고려해야 할 변수가 적다는 뜻이다. ‘국보 투수’ 선동열은 통산 평균 자책(1.20), 완봉승(29), 이닝 당 출루 허용률(WHIP·0.80)에서 압도적 1위다. 1993년 평균 자책 0.78을 기록하는 등 누구도 해보지 못한 0점대 평균 자책을 3번이나 기록했다. 146승(40패)만 한 게 아니라 132세이브도 했다. 정규시즌 MVP 3번에 골든글러브를 6번 수상했다. ‘무쇠팔’ 최동원은 통산 평균 자책 2위(2.46)이지만 선동열과는 더블스코어 차이다. 완투(81) 2위, WHIP(1.15) 3위.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을 합해 31승을 거뒀는데, 정규시즌 MVP와 골든글러브는 그 해에 딱 한 번 받았다. 103승(74패)에 26세이브.
이런 최동원이 선동열을 제치고 전문가로부터 만점을 받은 것은 경기 외적인 요소가 고려된 듯하다. 조지 오웰처럼 1984년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다. 공격 일변도의 투구 스타일과 화려한 경기 매너가 강점이다. 당시로선 쇠퇴기에 접어드는 20대 후반에 프로에 입문했다. 최고 연봉 선수로서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반면 선동열은 최동원처럼 5년 연속 규정이닝 두 배 이상의 투구를 하지는 않았다. 포스트시즌에선 이름값에 못 미쳤다. 20세기 최강팀 해태의 에이스였다. 그럼에도 선동열은 기량과 성적만 따지면 불세출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선수란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이번 투표는 전문가의 평가를 팬들이 뒤집어 양쪽의 손을 다 들어주는 절묘한 균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 이종범이냐, 이승엽이냐
이종범은 대졸이고, 이승엽은 고졸이니 6살 차이라도 거의 동시대에 뛰었다. 이종범은 공수주를 모두 갖춘 유격수이고, 이승엽은 거포 1루수이니 절대 비교는 어렵다. 타격 성적만 보면 ‘국민타자’ 이승엽이 훨씬 앞선다. 이승엽은 통산 홈런(467), 타점(1498), 득점(1355), 루타(4077), 장타율(0.572), 출루율+장타율(OPS·0.961) 모두 1위다. 2003년에는 시즌 최다 홈런(56) 신기록을 세웠다. 통산 타율(0.302)도 이종범(0.298)보다 높다. 정규시즌 MVP 5회, 한국시리즈 MVP 1회, 골든글러브 10회 수상을 했다. 수상 경력은 선동열을 앞선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최동원처럼 통산 성적 1위는 없다. 도루(510) 2위, 1994년 역대 시즌 타율(0.393) 2위가 고작이다. 정규시즌 MVP 1회, 한국시리즈 MVP 2회, 골든글러브 6회. 감독 입장에서 한 명만 고르라면 이종범과 야구를 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승엽이 뒷자리에 밀리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최고 투수와 타자 논쟁은 앞으로 KBO가 해외파와 현역 선수를 포함한 한국 야구 레전드를 뽑게 되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투수는 선동열 최동원에 박찬호 류현진이 가세한다. 단일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1983년 30승 장명부와 1982년 22연승 박철순을 빼놓을 수 없다. 타자는 이종범 이승엽에 추신수 이대호, 그리고 ‘바람의 손자’인 이정후가 후보가 될 수도 있겠다.
● 데드볼에서 라이브볼 시대로
이제부터 심화 과정이다. 진정한 최고를 가리려면 시간, 장소, 상대는 물론 역사·문화적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게 야구공의 반발계수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홈런 수는 주식시장처럼 100여 년간 꾸준히 우상향을 해왔다. 베이브 루스 시절인 1920년대에 납을 넣어 비거리가 나지 않아 죽은 공이라 불렸던 데드볼의 심이 코르크로 대체되면서 공격야구로 바뀌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인 KBO리그도 메이저리그와 비슷하다. 국내에는 최근까지 공인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구단이 스포츠용품 업체와 제각각 계약을 맺고 다른 공을 사용하다가 2016년이 돼서야 스카이라인 공인구로 통일했다. 그럼에도 1982년 원년부터 타율, 평균 자책 추이를 보면 꾸준히 우상향 추세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86년 리그 전체 평균 자책은 3.08인데 이는 2014년 평균 자책 1위 밴덴헐크(3.18)를 능가한다. 1984년 OB의 팀 평균 자책은 2.53으로 최동원급이었다. 반대로 2017년 KIA의 팀 타율은 0.302로 1989년 타격왕 고원부(0.327)를 위협한다. 2016년에는 리그 전체 타율이 0.290에 이르렀고, 1980~90년대 3점대이던 리그 평균자책은 5.17까지 치솟았다.
대체로 20세기는 투고타저, 21세기는 타고투저 시대다. 앞의 4인방은 시대의 도움을 받았다. 바꿔 말하면 옛날 타자와 요즘 투수에게 가산점을 줘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 회에는 이런 점들을 감안해 레전드 40인에 대한 본격 품평을 해보려고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