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고집’에서 ‘벤버지’로…벤투의 4년 4개월 되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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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년 12월 13일 11시 27분


파울루 벤투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과의 4년 4개월 동행을 마무리한다. 과정 속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끝은 아름다웠다. ⓒ News1
파울루 벤투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과의 4년 4개월 동행을 마무리한다. 과정 속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끝은 아름다웠다. ⓒ News1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큰 박수를 받으며 한국을 떠난다. 숱한 비난 속에서도 뚜렷한 소신과 확고한 방향성으로 대표팀을 지도한 그는 카타르 월드컵 16강이라는 결실을 맺으며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게 됐다.

대한축구협회(KFA)는 지난 12일 벤투 감독이 13일 오후 11시50분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 고국 포르투갈로 향한다고 전했다. 이로써 벤투 감독과 한국 축구의 동행은 일단락된다. 임기 4년 4개월.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꽤나 극적이었다.

벤투 감독은 지난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1승2패)의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8년 8월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카타르 월드컵까지 4년이 넘는 긴 호흡으로 한국 축구와 함께해 왔다. 한국 축구사를 통틀어 4년의 시간을 끊김 없이 준비해 월드컵에 나선 사령탑은 벤투가 처음이다.

2022카타르월드컵까지 축구국가대표팀을 지휘할 파울루 벤투(가운데) 감독이 23일 오전 경기도 고양 엠블호텔에서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 앞서 코치진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2018.8.23/뉴스1
2022카타르월드컵까지 축구국가대표팀을 지휘할 파울루 벤투(가운데) 감독이 23일 오전 경기도 고양 엠블호텔에서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 앞서 코치진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2018.8.23/뉴스1
◇ 벤투 감독은 첫날부터 그랬다

벤투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이제 우리는 긴 프로젝트를 시작할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다. 길게 보고 한국 축구만의 색깔을 갖추겠다는 큰 포부였다. 당시 벤투 감독이 밝힌 구상을 지금 다시 들으면 더욱 흥미롭다.

그는 한국 땅을 밟은 뒤 처음 진행했던 기자회견에서 “볼을 점유하고, 경기를 지배하고, 기회를 많이 창출하는 축구를 하고 싶다. 90분 동안 끊임없이 뛰면서 강한 면모를 보이는 정체성을 갖추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와 플랜을 제시했다.

그때는 너무 동떨어진 이상향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에서 그의 말이 얼마나 잘 구현됐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잘 다져진 빌드업 축구로 무장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에서도 ‘우리의 축구’로 결과를 냈다. 해피엔딩이었다.

파울루 벤투 남자축구국가대표팀이 12일 인천공항 제2터미널 출국장에서 호주 원정 친선 경기 출국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축구국가대표팀은 12일 호주, 20일 우즈베키스탄과 각각 경기를 치른다. 2018.11.12/뉴스1
파울루 벤투 남자축구국가대표팀이 12일 인천공항 제2터미널 출국장에서 호주 원정 친선 경기 출국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축구국가대표팀은 12일 호주, 20일 우즈베키스탄과 각각 경기를 치른다. 2018.11.12/뉴스1
◇ 시작부터 꼬리표 달렸던 벤투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니, 시작부터 험난했다. 당시 여론과 팬들은 충칭(중국)에서 6개월 만에 경질된 그를 두고 “‘중국 무대에서 실패한 감독’을 왜 한국이 품어야 하느냐”며 못마땅해 했다.

대한축구협회(KFA)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후보들 중 가장 프로페셔널하고 적극적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실패=다시 성공할 수 없음’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벤투 감독은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부터 수많은 비난과 마주해야 했다.

벤투 감독은 부임 초기 기존 2018 러시아 월드컵 주축 멤버들을 중심으로 삼되 새로운 선수들을 가미시켜 조금씩 다른 색을 입혀 나갔다.

미흡했지만 후방부터 짧은 패스로 풀어가려는 축구를 조금씩 시도, 확실한 목표를 향해 간다는 느낌을 심어줬다. 평가전에서 우루과이를 2-1로 꺾고 우즈베키스탄을 4-0으로 잡는 등 희망도 커졌다.

파울루 벤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16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 알냐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C조 조별리그 3차전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손흥민, 황의조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2019.1.16/뉴스1
파울루 벤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16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 알냐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C조 조별리그 3차전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손흥민, 황의조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2019.1.16/뉴스1
◇ 첫 번째 고비, 2019 아시안컵 8강 탈락

하지만 아시아 정상 탈환을 목표로 나섰던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에서 카타르에 패배, 허무하게 대회를 마감하며 첫 고비가 찾아왔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 중론이었지만 아시아 8강도 넘지 못하는 감독이라며 빠른 경질론도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벤투호는 아쉬움을 털고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에 돌입, 카타르를 향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경쟁 팀들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 보니 투르크메니스탄에 2-0, 스리랑카에 8-0 등 무난한 승리가 이어졌다.

2019년 12월에는 부산에서 열린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서 한일전 1-0 승리를 포함한 3전 전승으로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 따뜻한 연말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원정 친선경기에서 0-3으로 패했던 한국 축구대표팀(대한축구협회 제공)
일본 원정 친선경기에서 0-3으로 패했던 한국 축구대표팀(대한축구협회 제공)
◇ 두 번째 고비, 2021 한일전 0-3 참패

하지만 두 번째 고비가 발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국제 친선전을 갖기가 어려운 상황서, 2021년 3월 일본 원정 평가전을 나섰다가 0-3 참패를 당했다.

당시 벤투 감독은 손흥민(토트넘) 등 주축 선수들을 활용할 수 없는 여건에서 이강인(당시 발렌시아)을 제로톱으로 내세웠는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완성되지 않은 빌드업은 오히려 상대에게 전략적 허점을 노출하는 급소가 됐다.

가뜩이나 그때 벤투호는 5개월 전 멕시코와의 평가전서 후방 빌드업에 집중하다 실점의 빌미를 제공, 2-3으로 패하며 한국과는 ‘맞지 않는 옷’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숙적’ 일본에 굴욕적 패배까지 당하자 팬들은 더욱 등을 돌렸다.

언론도 싸늘했다. “벤투, 당신이 틀렸다”는 헤드라인을 앞세운 경질론이 힘을 받았다. 벤투호의 4년 4개월 중 비난이 가장 컸던 시기가 바로 그때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사과에 나설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벤투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고 뚝심으로 자신의 축구 철학을 계속 밀어붙였다.

손흥민이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차전 대한민국과 이란의 경기 전반전 선제골을 넣은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2022.3.24/뉴스1
손흥민이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차전 대한민국과 이란의 경기 전반전 선제골을 넣은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2022.3.24/뉴스1
◇ 벤투호의 빌드업, 날개를 달다

다행히 이후 벤투호는 차근차근 반등을 했다. 이 무렵부터 빌드업 축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내부 구성원인 선수들이 벤투 감독의 철학을 믿고 따르면서 큰 힘이 생겼다.

팬들은 매 경기 확실한 색을 갖추고 세밀한 플레이를 하려는 국가대표팀을 보며 “한국 축구가 재밌어졌다”며 반겼다.

결과도 따랐다.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서 이란을 11년 만에 잡는 등 속 시원한 결과와 함께 7승2무1패(승점 23)를 기록, 그 어느 때보다 마음 편히 본선행을 조기 확정했다.

비록 2022년 6월 브라질에 1-5 대패를 당했지만, 그래도 강호를 상대로 우리 축구로 맞불을 놓았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챙겼다.

이어진 칠레(2-0 승), 파라과이(2-2 무), 이집트(4-1 승)를 상대로는 결과도 놓치지 않았다. 팬들 역시 매 경기 만원관중으로 보답하며 벤투호에 힘을 실어줬다.

이강인이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카메룬의 친선경기 후반전을 마친 뒤 경기장을 거닐고 있다. 이날 경기는 대한민국이 1대0 승리를 거뒀다. 2022.9.27/뉴스1
이강인이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카메룬의 친선경기 후반전을 마친 뒤 경기장을 거닐고 있다. 이날 경기는 대한민국이 1대0 승리를 거뒀다. 2022.9.27/뉴스1
◇ 불필요했던 ‘이강인 논란’

전체적으로 순항을 이어가던 벤투호였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강인 논란’이었다.

벤투 감독은 언급했던 한일전 0-3 패배 이후 이강인을 쓰지 않았다. 외부에선 존재만으로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이강인을 월드컵에 꼭 데려가야 한다는 목소리와 4년 동안 다져놓은 팀 철학을 고려했을 때 이에 맞지 않는 선수를 급작스럽게 쓰는 건 무리라는 의견이 충돌했다.

월드컵을 앞둔 마지막 FIFA 공식 평가전이 열렸던 9월 코스타리카·카메룬전에선 이 잡음이 너무 커졌다.

이강인은 소집됐지만 출전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러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은 많은 팬들은 “이강인”을 외쳤고 벤투 감독에게 한 목소리로 야유하기도 했다.

“큰 틀에서 모든 선수들에게 가능성을 열어놓고 지켜봤다”던 벤투 감독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 26인에 이강인을 뽑아 우선 우려를 잠재웠다. 결과적으로 이강인은 본선에서 ‘조커’로 활약했고 벤투의 유연한 용병술도 박수를 받았다.

2일 오후(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의 경기에서 2대 1로 승리하며 16강을 확정지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2022.12.3/뉴스1
2일 오후(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의 경기에서 2대 1로 승리하며 16강을 확정지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2022.12.3/뉴스1
◇ 카타르에서 선보인 ‘우리의 축구’

마침내 4년의 기다림을 끝내고 본 무대에 오른 ‘벤투호’는 카타르에서 펄펄 날았다.

대망의 1차전에선 페데리코 발베르데(레알 마드리드)와 로드리고 벤탄쿠르(토트넘) 등 세계적인 2선을 보유한 우루과이를 상대로 중원을 압도했다. 준비했던 축구를 제약 없이 펼쳤다. 비록 0-0 무승부로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세계가 놀라기에 충분한 경기력이었다.

이어진 가나와의 2차전에선 2-3으로 패했지만 역시 ‘빌드업 축구’는 빛을 냈다. 아울러 벤투 감독은 이강인을 유연하게 활용, 기존 빌드업 축구에 창의성까지 더하는 좋은 전략과 교체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1무1패를 기록, 힘든 상황이었지만 벤투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그동안 두 번 밖에 16강에 오르지 못한 팀에서 왜 부담을 갖느냐. 여러분은 충분히 강하다. 부담갖지 말고 편하게 경기하면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라커룸 대화로 선수들의 자신감을 끌어냈다.

그리곤 포르투갈과의 3차전에선 한국 월드컵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펼친 끝에 2-1 역전승을 기록,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후 12년 만의 원정 16강을 이뤘다. 이 경기 역시 그동안 갈고 닦은 ‘빌드업 축구’가 빛을 냈다. 벤투 감독은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꼬옥 안아주며 새 역사를 쓴 선수들을 축하했다.

브라질과의 16강전에선 1-4로 패배, 대회를 마감했지만 이미 벤투 감독은 축구 팬들에게 ‘벤버지(벤투+아버지)’가 돼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카타르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환영 만찬에서 파울루 벤투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카타르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환영 만찬에서 파울루 벤투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벤고집’, ‘벤버지’로 한국을 떠나다

벤투 감독은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인천 공항에 입국, 수많은 팬들의 환호와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그는 입국장에서 “인생 뿐 아니라 축구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게 중요했다”면서 “난 처음부터 선수들을 믿었고 이 스타일(빌드업)이 우리가 월드컵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도 믿음을 갖고 따라왔다. 믿음이 있었기에 실현이 가능했다”고 자랑스럽게 되돌아봤다.

벤투 감독이 이 땅에서 처음 기자회견을 진행했던 4년 4개월 전의 그것과 맥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흔들렸고 비난은 끊이지 않았으며 경질론도 수차례 있었다. 그래도 벤투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결국 한국 축구에 큰 선물을 줬다.

수차례 고비를 견뎌내고 기어이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기에, 더 드라마 같았던 4년4개월이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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