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줄 알았던 슈퍼리그 재 출범 시도
구단 수익 증대와 UEFA로부터 독립 내걸고 다시 등장
챔피언스리그를 대체할 새 리그 추진
허황된 계획이라 비난 받지만 현 체제에 대한 불만 담아
UEFA 개혁 지지부진하면 언제든 비슷한 시도 재현될 수 있어
‘걸어 다니는 시체’ ‘속이기 위해 할머니로 분장한 늑대’….
새 출범을 시도하고 있는 유럽축구 슈퍼리그(ESL)에 쏟아진 혹독한 표현들이다. 슈퍼리그는 2021년 이미 한차례 대소동을 일으킨 뒤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슈퍼리그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자 슈퍼리그에 반대하는 측에서 격렬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의 이면에는 변화를 거부하는 현 유럽축구연맹(UEFA)의 기득권 보호 심리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2022~2023시즌 유럽챔피언스리그가 16강에 들어서며 한 창 절정으로 향해 가고 있는 즈음에 터져 나온 슈퍼리그 논쟁은 축구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2021년 호된 비판 받고 물러섰던 슈퍼리그
슈퍼리그는 2년 전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이상 스페인),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토트넘(이상 잉글랜드), 유벤투스, 인터밀란(이상 이탈리아) 등을 포함한 20개 팀으로 리그를 출범시킬 예정이었다. 챔피언스리그에 필적하는 새로운 리그였다. 유럽축구를 대표하는 주요 리그의 핵심 구단들이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이 중 핵심 구성원 15개 팀은 매년 고정적으로 참가하고 나머지 5개 팀만 바뀌는 체제를 운영하려 했다.
이 같은 구상이 알려지자 각국 축구 애호가들의 격렬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일종의 ‘귀족 리그’ 혹은 ‘그들만의 리그’를 운영하며 다른 팀들을 들러리 세운다는 비판이 일었다. 슈퍼리그는 결과적으로 고정 구성원에서 제외된 유럽 각국의 수많은 팀과 그 팬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슈퍼리그 참가 예정 팀들은 예상보다 격렬한 팬들의 반발에 놀라 잇달아 슈퍼리그 탈퇴를 선언했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유벤투스 3개 팀만이 남았다. UEFA는 슈퍼리그에 참가하는 선수들에 대해서는 UEFA가 주관하는 대회에 출전 금지하겠다는 제재방침도 정했다. 슈퍼리그는 사실상 무산되는 듯했다.
하지만 슈퍼리그 창설을 지원하고 있는 스포츠매니지먼트 사인 A22의 베른트 라이하르트 최고경영자(CEO)가 10일 새로운 구상안을 발표하면서 다시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A22는 그동안 새로운 축구 리그를 만들기 위해 50개 구단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 결과 유럽축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대한 공감을 끌어냈다고 주장했다. A22는 이를 바탕으로 슈퍼리그 창설을 위한 10개 원칙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새로운 내용 담아 다시 논쟁 점화
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첫째 참가팀의 대폭 확대이다. 기존 슈퍼리그 방안이 15개 고정 팀을 바탕으로 20개 팀이 참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고정 구성원 없이 매년 60~80개 팀이 참가하는 대규모 리그를 개최하자는 안을 들고나왔다. 둘째 UEFA와 같은 별도의 기구가 아니라, 참가 구단들이 주체가 돼 리그를 운영하자는 안을 들고 나왔다. 경영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실제 선수들을 관리하고 경기하는 주최는 각 구단인데, 일선에서의 위험은 전혀 감당하지 않으면서 이익금만 챙겨가는 별도의 축구 관리 단체는 필요 없다는 방침이다. 셋째 더 많은 이익금의 분배이다. 경기 수를 늘리고 추가 소득원을 개발해 구단들에게 더 많은 돈을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넷째 거대 자본에 축구가 휘둘리게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각 구단은 선수 영입 등에 있어서 축구로 번 돈 내에서만 지출을 할 수 있게끔 보다 엄격한 재정 규칙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다섯째 선수 건강을 중심에 놓고 리그를 운영하겠다는 점이다. 해마다 경기 수를 정할 때 선수 건강을 고려해 일정을 짜고, 현 수준보다 경기 수를 더 늘리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이 밖에 여자축구 강화, 각국 국내 리그 강화, 팬 서비스 강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 같은 안이 발표되자 하비에르 테바사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회장은 “슈퍼리그는 유럽축구를 속이기 위해 할머니로 분장한 늑대”라고 비꼬았다. 잉글랜드 응원단 단체에서는 죽은 슈퍼리그가 다시 걸어 나오고 있다며 ‘좀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다시 등장한 슈퍼리그는 일단 차갑고 조롱 섞인 반응을 겪고 있다.
하지만 A22는 슈퍼리그가 UEFA와 끝까지 법적투쟁을 벌이며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슈퍼리그는 UEFA가 새로운 리그를 창설하려는 팀들을 제재할 권리가 있는지를 두고 유럽연합사법재판소에서 소송 중이다. UEFA의 제재가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려는 부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재판 결과는 올해 안으로 나올 예정인데, 이르면 다음 달에 나올 수도 있을 전망이다.
그렇다면 슈퍼리그의 비전과 주장은 모두 허황한 것일까. 2021년 슈퍼리그 구상안이 처음 발표됐을 때는 비난을 받을 이유가 명확했다. 공정한 경쟁 없이 특정 팀들만 고정적으로 참여하려는 폐쇄적인 구조에 비난이 집중됐다. 당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경기장을 찾는 팬들이 급감하면서 구단의 수익이 크게 줄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팀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만 고정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리그를 만들려 했다는 의심을 샀다. 당시 미국계 투자은행 JP모건이 슈퍼리그 창설을 위해 막대한 뒷돈을 대기로 함에 따라 미국 자본이 유럽축구 시장을 파고들려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도 발동됐다. 슈퍼리그는 궁극적으로 UEFA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수익구조를 갖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축구의 공정성을 해치는 데 대한 팬들의 비난과 지배체제가 무너질 것을 염려한 UEFA의 강경 대응책이 겹치면서 슈퍼리그는 발붙이지 못하는 듯했다.
명분뿐일지라도 현 축구계 문제 해결을 목표로 내걸어
하지만 슈퍼리그가 이번에 새롭게 들고나온 주장 중에는 되새겨볼 만한 내용들도 있다. 더 많은 팀이 참가하는 열린 리그를 통해 더 많은 수익금을 배분하자는 주장, 선수들을 보호하자는 주장, 거대 자본에 휘둘리지 말자는 주장 등 현 유럽축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열거한 것이다.
현 챔피언스리그는 대형 클럽 간의 경연장이 되고 있을 뿐 중소 팀들은 참가 기회를 얻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유럽축구 전체적으로 최근 몇 년간 경기 수가 많이 늘어나며 선수들이 혹사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중동 자본들이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시티,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PSG) 등을 인수하며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어 초호화 구단을 만든 뒤 리그 우승을 독차지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축구계가 구단의 자본 투입 능력에 따라 지나치게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여기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다른 리그 간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몇몇 구단들이 새 판을 짜려는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세계적인 회계법인 딜로이트가 지난달 발표한 세계 부자 구단 순위에 따르면 2021~2022시즌 수입 상위 20개 팀 중 11개 팀이 프리미어리그 소속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딜로이트의 부자구단 순위에서 1위 맨체스터 시티(프리미어리그)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맨체스터 시티는 지난 시즌 6억1910만 파운드(약 9604억 원)을 벌어들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6억450만 파운드(약 9376억 원)을 벌었다. 바르셀로나는 5억4050만 파운드(약 8383억 원)로 7위, 유벤투스는 3억3930만 파운드(약 5264억 원)로 11위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전 시즌에 이어 2위를 지켰지만 바르셀로나는 4위에서 7위로, 유벤투스는 9위에서 11위로 떨어졌다.
프리미어리그의 시장 경쟁력은 더 많은 투자를 끌어내며 다른 리그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단적인 예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는 포르투갈 구단 벤피카로부터 엔도 페르난데스(22)를 영입하며 이적료로 1억2100만 유로(약 1671억 원)를 지급하는 등 올겨울 이적시장에서만 3억2950만 유로(약 4552억 원)를 썼는데 이는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소속 리그의 팀들이 같은 기간 쓴 총 이적료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돌파구 필요한 구단들에게 출구 자처… 구체적 방안은 부족
프리미어리그에 자본과 선수의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다른 리그들에서는 장기적인 수입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슈퍼리그 참여 구단들은 새로운 형태의 리그를 창설하고 주도함으로써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려 하고 있다. 슈퍼리그는 UEFA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수익구조를 마련하면 UEFA에 지급하던 각종 이익금을 구단들로 돌려 장기적으로 구단들에 더 크고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며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여러 구단들에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슈퍼리그는 2021년 고정 구성원 위주로 리그를 운영하려 했던 점 때문에 아직도 그 저의를 의심받고 있다. 슈퍼리그의 주장처럼 구단들끼리 리그를 운영하자는 제안은 솔깃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구단들끼리 리그를 운영할 때 결국은 또다시 영향력 있는 구단들의 목소리가 커질 게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UEFA가 갖고 있던 행정적 권한을 몇몇 소수 구단이 나눠 갖게 되는 식으로 모양만 바뀔 뿐이고, 중소 팀들은 UEFA와 같은 객관적인 행정 기구가 있을 때보다 이익에 민감한 거대 구단들에게 더 크게 휘둘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슈퍼리그는 각종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를 실천할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않고 있어 공허한 주장만 하고 있다는 비판도 듣는다.
UEFA의 개혁적 대응 필요… 지지부진하면 언제든 비슷한 논쟁 재발
슈퍼리그의 도전에 대해 UEFA는 슈퍼리그 참가팀들에 대한 제재뿐만 아니라 자체 개혁을 시도해 일부 불만을 누그러뜨리려 하고 있다. 유럽축구연맹은 2024~2025시즌부터 챔피언스리그 개편안을 적용한다. 기존 32개 팀에서 36개 팀으로 참가팀을 늘리고 경기 수도 125경기에서 225경기로 거의 두 배로 늘린다. 전체적으로 더 많은 팀을 참가시키고 경기 수를 늘려 팀들에 가져갈 수 있는 수익을 증대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참가팀 증대와 수익배분 증대 등 슈퍼리그가 주장했던 내용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경기 증대에 따른 선수 혹사 논란, 축구팀들이 자본에 의해 휘둘리는 현상 등을 막으려는 방편 등에 대해서는 특별히 새로운 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UEFA가 더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 이상 슈퍼리그 출범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그 바탕에 깔린 팀들의 불만과 현안들을 해소하기는 힘들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 타임스는 ‘챔피언스리그와 슈퍼리그? 누구도 승자가 아니다’라는 내용을 게재하며 양측 모두를 비판했다. 슈퍼리그는 개혁을 들고나왔지만 진정성과 구체성이 부족하고, 챔피언스리그는 슈퍼리그 출범을 막고 있지만 자체의 개혁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논쟁에서 불거진 문제점들을 현 축구계가 얼마나 받아들여 해결해 나가는지가 앞으로의 추이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슈퍼리그 출범은 무산되더라도 슈퍼리그 출범을 부추긴 근본 원인에 대한 해결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비슷한 시도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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