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들의 이적소식을 다루는 글이 99.9%인 유럽축구 이적시장 전문가 파브리치오 로마노의 트위터에 5일 40초짜리 ‘나폴리 영상’이 올라왔다. 높은 곳에서 나폴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찍은 동영상인데, 세계 3대 미항이라고 불리는 ‘바다도시’에 바다는 안 보였다. 다만 눈을 돌리는 곳곳마다 폭죽이 터지고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33년 만에 지역 연고 축구팀 나폴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우승을 확정한 날 도시 곳곳에서 축제가 열린 나폴리의 모습이었다.
이날 나폴리 기사에 외신들은 ‘AD’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Anno Domini)’라는 의미를 가진 ‘기원 후’를 뜻하는 약어가 아니라 ‘디에고 이후(After Diego)’를 뜻하는 말이었다. 나폴리가 축구로 온 도시가 이날처럼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시기가 앞서 두 번 있었다. 아르헨티나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1960~2020)가 활약하던 1986~1987시즌과 1989~1990시즌이다. 마라도나가 오기 전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로 꼽힌 세리에A 소속이었지만 유벤투스, AC밀란, 인터밀란 외에 ‘기타 등등’이던 나폴리는 ‘디에고 시절’ 축구로도 일약 유명 팀이 되고 2차례 우승도 했다. 그리고 이날 디에고 이후 처음이자 통산 3번째로 우승하는 날도 왔다.
마라도나 시절에야 ‘기대치’라도 있었겠지만, 이번 시즌을 앞두고 나폴리의 전력은 우승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있었다. 한 시절을 풍미하던 주축들이 빠져나가고 대체자들이 빈 자리를 메워가던 시기였다. 발롱도르 후보까지 올랐던 세계 최정상급 센터백 칼리두 쿨리발리(31·첼시)의 빈 자리를 한국선수 김민재(27)의 영입으로 메운다고 했을 때, 나폴리 팬들의 심경은 아우렐리오 데라우렌티스 나폴리 회장의 표현을 빌자면 “농담처럼 들렸다”였을 거다. 그렇게 조지아에서 흐비차 크바라츠헬리아(21)라는 선수도 나폴리 유니폼을 입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나폴리는 이번시즌 세리에A에서 가장 강한 팀이었다. 개막 후 15경기 연속 무패(13승 2무)로 선두로 안착한 것을 비롯해 공수에서 가장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했다. 이번 시즌 나폴리는 리그 20팀 중 가장 많은 골(69)을 넣었고 실점(23)은 가장 적었다. 축구 통계사이트 소파스코어에 따르면 도움(52), 경기 당 평균 유효슈팅(5.7개), 평균 점유율(62.6%), 평균 패스성공률(87.6%), 평균 드리블(9.1) 등 여러 공격지표에서 1위에 올랐다. 공격보다 팀 수비 세부지표에서 상위에 올라있는 항목을 찾아보기 힘든데, 달리 설명하면 상대팀을 상대진영에 ‘가둬놓고 두들겨 팼다’는 의미다.
‘축구변방’으로 불리는 한국과 조지아에서 온 김민재, 크바라츠헬리아의 영입은 이번 시즌 나폴리 우승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겉만 한국인이지 피지컬, 스피드가 여느 유럽선수에 견줘 밀리지 않는 게 아니라 우월한 김민재는 나폴리가 포백 수비라인을 끌어올려 보다 공격적인 축구를 전개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나폴리가 킥오프 때 골키퍼와 센터백 듀오 김민재와 아미르 라흐마니(29)를 뺀 8명을 하프라인에 세워 상대 진영으로 달리는 전투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 화제를 모았는데, ‘철기둥’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민재가 든든히 버티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지아, 러시아리그에서 뛰던 윙어로 돌파에 능한 크바라츠헬리아도 나폴리에서 장점을 십분 활용하며 상대팀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농구로 비유하면 ‘붙으면 돌파하고 떨어지면 슛을 쏘는’ 만점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번 시즌 리그 27경기에 출전해 12골 10도움을 기록 중인 크바라츠헬리아는 마라도나의 이름이 더해져 ‘크바라도나’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나폴리 우승을 앞두고 우승요인을 분석한 스포츠 매체 ESPN은 나폴리 선수단의 국적 구성을 언급했다. ESPN은 “나폴리는 이탈리아 선수 비율이 매우 적다. 8명에 불과한데 이중 대부분이 유망주다. 한국 선수 김민재를 포함해 16개 나라 선수들이 축구라는 공통어로 똘똘 뭉쳤다”고 했다. ESPN에 따르면 첫 우승 당시 외국인은 마라도나가 유일했고 두 번째 우승 당시 마라도나를 비롯해 브라질 선수 2명이 합류해 총 3명이었다. ESPN은 “이탈리아 색채가 강했던 팀이 다국적 팀으로 변모했다. 여러 나라에서 인재를 찾았고 기반을 다져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16개국에서 모인 ‘재능’들은 30여 년 전 축구영웅이 안겨다줬던 영광을 팬들 앞에 재현했다.
발품 열심히 팔아 성공한 나폴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제 ‘집 단속’이다. 김민재, 크바라츠헬리아를 비롯해 빅터 오시멘 등 주축들이 빅클럽들의 표적으로 자주 언급돼왔다. 세리에A 우승 트로피는 리그 일정이 모두 끝나는 다음달 4일 받을 예정이라 축제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지는 게 정상이겠지만 시즌 내내 가치가 치솟는 주축들의 이적설에 시달린 나폴리의 긴장감은 벌써부터 읽히고 있다. 우승 직후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와의 인터뷰를 한 데라우렌티스 나폴리 회장은 “이번 여름에 오시멘을 절대 팔지 않겠다. 불가능하다(no way)”라며 공개단속에 나섰다.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에 대해서도 “계약 상 다음시즌 옵션을 이미 실행했다”고 덧붙였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나폴리의 영광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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