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고스란히 남은 여자 축구대표팀의 ‘진정성’[김배중 기자의 볼보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7일 16시 42분


아이티와의 평가전 겸 월드컵 출정식을 하루 앞두고 7일 경기 파주 축구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공격수 박은선과 콜린 벨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아이티와의 평가전 겸 월드컵 출정식을 하루 앞두고 7일 경기 파주 축구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공격수 박은선과 콜린 벨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이게 다 감독님 때문입니다(웃음).”

8일 아이티와의 ‘월드컵 국내 출정식’을 앞두고 7일 경기 파주 축구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박은선(37)에게 취재진이 “볼 살이 빠진 것 같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박은선은 “(대표팀 소집 전) 발목을 다쳐 (소집 이후에) 신경 써서 재활을 한 뒤 훈련에 복귀해서 최근에는 모든 운동을 다 소화하고 있다. 매일 고강도 훈련을 해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박은선은 2019년 10월 한국 지휘봉을 잡은 콜린 벨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일찍이 “온실 속 화초처럼 잘 키워 월드컵에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 선수다. 박은선은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키 180cm의 장신 공격수다. 유럽, 남미 팀에 비해 ‘피지컬’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한국으로서 박은선은 국보 같은 존재다. 박은선은 2004년 20세 이하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총 8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르는 등 아시아 여자선수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좋은 신체조건 ‘탓’에 성별논란에 시달리며 방황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랬던 박은선에게 벨 감독은 ‘온실 속의 화초’같은 다정한 말로 박은선이 폼을 되찾을 수 있게 했다. 동기부여를 받은 박은선도 벨 감독에게 화답하듯 점점 옛 기량을 되찾아갔다. ‘벨 호’ 출범 4년차였던 지난해 7월부터 대표팀에 소집돼 경기를 뛰기 시작한 박은선은 첫 6경기에서 득점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 4월 잠비아와 치른 2차례의 평가전에서 박은선은 총 3골을 넣으며 부활했다. 박은선이 2014년 5월 여자 아시안컵에서 골을 넣은 이후 약 9년 만에 터진 A매치 골이었다.

지난달 18일 첫 소집 당시 박은선의 모습. 대한축구협회 제공
지난달 18일 첫 소집 당시 박은선의 모습. 대한축구협회 제공

박은선의 야윈 얼굴은 집중 케어 대상까지도 벨 감독이 평소 강조해 온 고강도 훈련을 진심으로 따랐다는 표시다. 박은선이 야윈 이유가 ‘감독님 때문’이라고 했지만 원망은 아니었다. 박은선은 이날 기자회견 내내 벨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 박은선은 “늘 감독님이 많이 생각해준 걸 안다. 제가 다쳤을 때 항상 신경써줬다. 당연히 보답하고 싶다. 경기장 안에서 골을 넣으면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걸 한 게 아닐까.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적이 없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골을 넣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얼굴이 달라져 있던 건 박은선 뿐만이 아니었다. 62세지만 평소 철저한 운동과 함께 식단관리를 병행해 군살 없는 몸을 갖고 있는 벨 감독도 지난 3주 동안 과장을 보태면 ‘초췌’해졌다. 평소처럼 짧은 머리를 위로 세웠지만 얼굴 살이 없어진 탓인지 머리칼이 더 무거워보였고 얼굴도 예전보다 탔다.

소집 훈련 기간동안 벨 감독은 무더운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선수들에게 고강도 훈련을 강조하며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을 노릇이다. 선수들이 스스로를 극복하게 하기 위해 벨 감독이 선택한 길은 ‘솔선수범’이다. 대표팀 최고참인 김정미(39)는 벨 감독에 대해 “선수들의 경쟁심이나 투쟁심 같은 걸 일깨우는 데 일가견이 있다. 신기한 건 선수 입장에서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게 컨트롤을 잘 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소집 훈련 기간 동안 파주 축구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선수들과 함께 뛴 벨 감독(오른쪽). 대한축구협회 제공
소집 훈련 기간 동안 파주 축구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선수들과 함께 뛴 벨 감독(오른쪽). 대한축구협회 제공

훈련의 성과는 선수들 얼굴에 고스란히 남았고, 선수들은 “준비가 됐다”고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3일 훈련에 앞서 취재진 앞에 섰던 여자 대표팀의 간판 지소연(32)은 “선수들의 체력이 많이 올라왔고 (경기에) 뛸 준비가 됐다. 아이티와의 평가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대한축구협회가 매달 발간하는 기술리포트 ‘온사이드’에 따르면 최근 여자 대표팀 선수들을 대상으로 월드컵 기대성적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는데, 소집선수 31명 중 16명이 ‘8강’이라고 답했다. 박은선은 7일 기자회견에서 “선수들 절반 이상이 8강이라고 답했다는 건 그만큼 체력, 기술, 전술 적인 면에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제 월드컵 본무대가 눈앞이다. 여자 대표팀은 8일 아이티와의 평가전을 치른 뒤 10일 2023 호주·뉴질랜드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이 열리는 호주로 출국한다. 16일 호주에서 네덜란드와 비공개 평가전을 한 차례 더 치른 이후 25일 콜롬비아, 30일 모로코, 다음달 3일 독일과 조별리그 3경기를 치른다. 조별리그 성적에 따라 2015년 대회 이후 역대 2번째 16강 진출 여부도 결정된다.

‘준비된’ 여자 대표팀은 많은 관심과 응원을 기다린다. 벨 감독은 “남자 대표팀이 안방에서 경기를 할 때 5~6만 명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아 처음 휘슬이 불릴 때부터 끝날 때까지 환상적인 응원을 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감사하는 마음이다. 응원을 잘 하는 한국 팬들 앞에 우리도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응원 온 분들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준비를 잘 하겠다”고 말했다.

큰 대회를 앞두고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선수나 지도자들은 으레 선전을 다짐한다. 객관적인 전력이 좋든 나쁘든 승부의 세계에서 지고 싶은 선수나 지도자는 없기 때문이다. 여자 축구대표팀도 월드컵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겠다고 다짐했다. 믿거나 말거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다짐이 헛말 같지 않게 느껴진 건 여자 대표팀 ‘온실 속의 화초’의 달라진 얼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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