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일본농구협회(JBA) 홈페이지에 의미심장한 소식이 하나 올라왔다. 일본 최대 IT 기업인 소프트뱅크 그룹이 일본 남자 농구 대표팀에 1억 엔(약 9억 8000만 원)의 포상금을 지급했다는 알림이었다. JBA는 이 돈을 8~9월에 걸쳐 열린 2023 FIBA(국제농구연맹) 농구 월드컵에 출전한 일본 남자 대표팀 선수, 스태프 포상과 팀 전력 강화 비용으로 쓰겠다고 밝혔다.
● 소프트뱅크, 日 男농구 대표팀에 10억 포상금… 스폰서 유치도 러시
일본 대표팀은 농구 월드컵 조별리그와 순위 결정전에서 핀란드, 베네수엘라, 카보베르데를 연파하고 3승을 따내며 19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16강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진 경기에서도 독일, 호주 등 강호들을 맞아 접전을 펼쳐 한층 높아진 경쟁력을 뽐냈다. 한국은 출전도 못 했다.
일본은 이번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순위에 올라 내년 파리 올림픽 출전권까지 따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48년 만에 자력으로 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따낸 쾌거에 일본 농구계는 축제 분위기다. 도쿄 올림픽 선전(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출전)에 이어 이번 월드컵에서도 세계 수준과의 거리를 좁히며 JBA가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30년에 목표로 잡은 세계 8강 진입 노력이 더 탄력을 받을 모양새다.
이에 소프트뱅크가 신속하게 반응했다. 소프트뱅크는 2016년부터 JBA의 공식 스폰서를 맡고 있다. 지금까지 남녀 대표팀과 B.리그(일본프로농구)도 후원하고 있다. 2016년 2월 B.리그가 출범하기 전 후원 계약 당시 일본 언론이 알린 지원 규모는 4년에 125억 엔(약 1120억 원) 수준. 일본에서 농구는 상대적으로 야구, 축구에 비해 인기가 떨어지는데도 지금까지 파격적인 액수로 후원 계약을 유지해 왔는데 또 한 번 통 크게 단발 지원 사격을 했다.
일본 농구는 2021년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녀 대표팀 경기력이 급성장하면서 후원 계약이 몰려들었다. JBA는 올해 3월 일본 맥도널드와 후원 계약을 맺었다. 5월에는 일본의 글로벌 인쇄-포장, 디지털 솔루션 회사인 ‘Toppan‘과도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7월 초에는 일본의 3대 은행 중 하나인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은행 그룹과 후원 계약을 맺었다.
7월 말에는 나이키 산하 독립 브랜드로 분화된 ‘조던 브랜드’가 새 후원자가 됐다. 조던 브랜드는 프랑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농구 국가대표팀을 후원하고 있는데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조던 브랜드는 JBA가 주관하는 윈터컵, 주니어 원터컵과 전국 미니농구 토너먼트까지 지원할 계획을 밝히면서 일본 농구 문화 발전 전반에 기여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현재 JBA는 14개 가량의 후원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데 내년 파리 올림픽까지 2~3개 일본 굴지의 기업들이 추가로 스폰서가 될 것이라는 게 일본 언론의 관측이다.
● 한국 농구 대표팀과는 후원 계약 종료한 나이키… “비용 절감 때문 아니다”
반대로 대한민국농구협회는 나이키와 지난해 12월 후원 계약을 종료했다. 양측 사정을 잘 아는 농구 관계자들에 따르면 외관상으로는 양측의 입장 차이에 의한 자연스러운 합의 계약 종료였으나 사실상 나이키가 후원 의지를 접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이키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남자 농구에서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자 이듬해부터 농구협회와 후원 계약을 맺고 지난해까지 현금과 용품 등을 지원했다. 농구협회는 2002년만 해도 후원 스폰서가 없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는데 나이키 합류로 대표팀 지원에 숨통이 트였었다. 12월 계약 종료 전까지 나이키는 매년 5억 원 상당의 현물과 1억 원의 현금 지원을 해왔다.
나이키가 농구 대표팀 20년 후원의 마침표를 찍게 된 건 더 이상 농구협회를 지원할 명분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계약 협의 사정에 정통한 한 농구인은“남자 농구의 경우 아시아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농구협회 차원에서 구체적인 대표팀 운영 목표와 훈련 계획을 세워 국제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로 무대에서 뛰는 주력 선수들만 모아 놓으면 ‘성적 나오겠지’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뒷짐만 지고 있었다”며 “시간이 갈수록 나이키 내에서는 농구협회가 후원 파트너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점점 커졌다”고 전했다.
게다가 나이키는 대표팀을 후원하면서 대표 선수들의 용품 지급 부족 사태가 터질 때마다 비난의 직격탄을 맞았다. 사실 나이키는 대한축구협회에도 1년에 200억 원 이상을 쓰는 굴지의 글로벌 스포츠 기업이다. 용품 수급 논란에서 나이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건 웬만한 농구인들은 다 안다. 비용 아끼려고 농구협회와 재계약을 안 한 게 아니다. 여러모로 나이키로서는 한국 농구 대표팀의 후원사 수식어를 달고 있을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라고 말했다. 농구협회는 지난해 12월 나이키와 스폰서 계약이 종료되고 올해 9월에서야 프로스펙스와 후원 계약을 맺었다. 현재 농구협회에 후원을 하는 스폰서는 KB국민은행, 프로스펙스, 유한양행 정도다.
대표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제적 투자, 마케팅 등의 목표 설계가 부족했던 한국과는 달리 JBA는 2016년부터 협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30년까지 단계적 경쟁력 강화 로드맵을 만들어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 왔다. 지난 7월 발표한 사업 보고서에도 성인 대표팀이 연령대별 대표팀과 연계해 가능성 있는 젊은 선수를 대표팀으로 끌어올리는 이른바 ‘통관 프로젝트’의 강화, 해외 거주 일본 국적을 가진 장신 유망 선수 발굴, 농구 강국 독일-호주 및 FIBA, FIBA 아시아 등과의 제휴 강화, 각급 대표팀 경기와 대회 홍보 및 노출 확대, 국내 등록 선수 증가 등을 위한 계획과 실행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하치무라 루이(LA레이커스), 와타나베 유타(피닉스) 를 잇는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진출 지원 계획도 재조정했다.
농구팬들이 관심을 크게 가질 만한 목표를 줄기차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올해 JBA는 2022년도 5억 2100만 엔(약 46억 9500만 원)보다 훨씬 많은 19억 9900만 엔(약 180억 원)을 경기 외 기타 사업 수익으로 벌어들였다. 그러면서 2024년 목표로 잡은 대표팀 경기력 강화 등의 사업 예산 100억 엔(약 905억 원) 확보 등을 가시권에 두게 됐다.
2016년 취임해 현재도 일본 농구를 이끌고 있는 미츠야 유코 JBA 회장은 농구인이 아니다. 1984년 LA 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리스트다. 농구를 ‘1’도 모르고 회장이 됐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내며 지난 6월 회장 5선 연임에 성공했다. 또 FIBA 아시아 이사로도 재선임되며 2027년까지 국제 농구계에서도 비중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 의지의 차이 크다
대한농구협회 권혁운 회장은 2021년 취임 직후 협회 운영에 도움을 주려고 10억 원을 농구발전기금으로 쾌척했다. 그러나 이 재원을 대표팀의 경쟁력 강화, 유망주 발굴 등에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2년 정도 겉으로 적금해 놓은 모양새다. 기금을 발판 삼아 새로운 수익 창구를 찾으려는 농구협회 차원의 움직임도 미비하다. 농구협회가 가장 최근에 공개한 2021년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당해 기타 사업 수익이 없었다.
단순히 대표팀 소집, 국제대회 참가 등에 국한돼 행정이 지원되고 지출 등이 이뤄지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대표팀 감독이 선수, 훈련 관리를 넘어 대표팀 전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홀로 알아보고 일정 부분 행정 업무에도 관여해야 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그렇다고 지원이 속 시원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조상현 전 남자 대표팀 감독(현 LG 감독)이 전력 강화 차원에서 23세 이하 대표팀 설치, 운영에 관심을 보였으나 비용 벽에 막혀 논의 수준에서 불씨가 꺼졌다. 현 추일승 남자 대표팀 감독은 항저우 아시아경기를 준비하면서 오로지 선수 훈련, 관리에 매달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이훈재 코치 외에 추가로 전술 코치를 필요로 했으나 이것도 비용 문제 때문에 진행이 중단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 남자 농구 대표팀은 지난 월드컵에서 5명의 코치가 감독을 보좌했다.
스폰서가 많고 적고를 따지는 데 있어서 한일 양국 협회의 의지 차이가 크다는 게 비교의 핵심이다. 지난 5월 농구협회는 자체적으로 발족시킨 ‘한국 농구 미래 발전 전략 추진위원회’의 논의와 보고서를 통해 향후 10년간 저변을 확대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겨울철 최고 인기 스포츠 위상을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재정 자립까지 공고히 구축하겠다는 의지도 전했다. 당시 권 회장은 “한국 농구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개편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는데 이후 꽤 시간이 지났다.
개혁의 활로를 모색한 건 긍정적이나 점진적이면서 중장기적인 프로젝트로 규정했다. 다소 개혁의 속도감이 정체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당장 변화의 동력으로 기대할 건 현재로선 추일승 호가 항저우 아시아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일밖에 없다. 추 감독은 항저우로 출국하면서 “은메달, 동메달은 의미 없다”며 고군분투 의지를 다졌다.
감독에게 한국 농구의 운명을 온통 맡기고 마음 편하게 손 놓고 있을 상황은 아닌데 농구협회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한 농구인의 모친상 글과 항저우 아시아 경기 중계 일정만이 가장 업데이트된 소식으로 초라하게 올라와 있다. 반면 JBA는 홈페이지를 통해 연일 아시아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항저우에 입국한 남녀 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의 인터뷰와 전략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우리 농구는 이런 상품성이 있다’는 점을 다각적으로 포장해 스폰서들에게 노출하고 있다. 스폰서 입장에서 돈 주고 살만한 ‘물건’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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