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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홍일식 지음

입력 | 1996-10-23 20:52:00


나폴레옹 점령군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행해진 피히테 교수의 강연 「독일 국민에 게 고함」은 외세 침략 하의 독일 국민에게 분기를 촉구하는 단순한 정치적 강연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피히테의 역사관 민족관과 함께 인류에 대한 웅대한 희망이 들 어 있다. 거의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피히테의 책이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시공을 초월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간된 고려대 홍일식 총장의 저서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읽으 면서 얼른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연상케 되는 까닭은 첫째, 이 책의 내용이 당면한 우리의 현실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파헤치고 민족사의 비전을 제시하 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피히테와 같이 홍 총장의 저서도 학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우리가 지닌 고유의 정신적인 가치의 총체인 전통 문화의 창조적 계 승을 통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앞으로의 세계정신을 이끄는 문화대국으로서 21 세기 인류문명의 견인차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근세 조선의 건국 이념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었음을 확인, 증 명하고 과거의 예송(禮訟)도 부정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이를 고매한 이념과 가치 논쟁으로 평가하는 이색적인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도덕적 황폐화를 극복하는 일이 오늘의 우리 앞에 놓인 최대 의 과제 중의 하나로 보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효(孝)사상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부친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의 효심이 불교에서 온 것도, 유교에서 온 것 도 아닌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이요 종교요 정서임을 논증한 장면이다. 효녀 심청의 지극한 효성이 맹인 잔치의 최후 순간에 부친의 눈을 뜨게 한다. 심 청의 효심이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것은 민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심청의 효가 자기 아버지 심봉사의 개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잔치에 참석한 모든 맹인들의 눈이 함께 열려 광명을 찾는다. 여기에 한국적 효사상 이 갖는 보편성이 있다. 「심봉사의 개안」이 「우리 민족 전체의 개안」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세계인의 개안」으로 발전하여 인류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 앞에 독자는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 효운동의 세계적 전개 가능성의 제시다. 오랜만에 만난 필독서로 느껴져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험해도 한 가닥 위안이 된다. 박 용식 (건국대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