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賢眞기자」 하루에도 수많은 기업들이 명멸하는 미국 실리콘밸리. 그 곳에 공업고 졸업장 하나만을 들고 뛰어들어 벤처기업가로 우뚝선 김인곤씨(41). 그가 사장으로 있는 AIO사는 반도체 웨이퍼를 감광하고 건조시키는 반도체장비 생산업체. 연간 매출액 3천만달러(한화 2백40여억원), 직원 1백20명. 아직은 규모가 작지만 매년 성장률이 100%가 넘어 무서운 신예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개발을 마친 반도체 웨이퍼건조기는 기존 제품과 달리 증기가 아닌 초음파를 사용한 혁신제품. 이미 모토롤라 휴렛패커드(HP) 휴즈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납품계약을 마친 상태로 조만간 이 분야 세계10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지난 79년 캘리포니아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는 깜깜했다. 전주공고 졸업후 대한항공 기능공생활 1년이 경력의 전부. 항공업체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운좋게 입사한 곳은 반도체장비업체. 이어 그는 휴렛패커드 등의 업체로 옮겨다니며 반도체기계 정비업자로 일했다. 그러나 고졸이라는 학력탓에 정비공 이상의 직책은 주어지지 않았다.회의가 밀려왔다. 『이거 하려고 미국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더 큰 일에 도전하고 싶었죠』 지난 88년 회사를 떨치고 나왔다. 당연히 고졸 정비공출신에게 어떤 투자자도 돈을 대지 않았다. 사무실임대료 5천달러가 없어서 부인이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던 시절. 그는 이때가 가장 가슴아팠다고 한다. 대신 그에게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당시는 호황이라 장비업체는 팔기만 바빴죠. 서비스는 뒷전이었구요. 그 틈새를 노렸습니다. 정비공 생활 9년간 닦은 실력으로 각 업체의 반도체장비를 손봐주었죠』 이어 중고장비를 구입한 뒤 수리해서 재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제품에 대한 반응이 좋아 91년과 92년 각각 모토롤라와 내셔널세미컨덕터로부터 우수기업체상을 타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94년 자체생산에 나서면서 변신에 성공, 오늘을 일궈냈다. 생산기술이 없던 그였기에 우수한 엔지니어를 과감히 채용했다. 그는 지금의 성공이 믿어지지 않는다. 『창업당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면 「무리수」라고 말했을 거예요. 어떤 조건도 맞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틈새전략과 우수한 인재의 과감한 고용이 저를 살린 것 같아요』 그는 가급적 고생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벤처기업들이 겪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거둔 것을 뿌리고 싶어요』 그래서일까. 요즘 그는 한국에서 함께 일할 파트너를 찾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