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基太기자」 화랑 골동품상이 빼곡한 서울 인사동 거리에 오래된 서향(書香)을 보태고 있는 고서점 통문관(通文館). 70여년의 세월을 책더미에 묻혀 고서적들이 지나가는 통로이자 창고역할을 자임해온 이곳 주인 이겸로씨가 20일로 미수(米壽·88세) 생일을 맞는다. 그는 스스로를 『고서더미에 묻혀 책을 갉아온 좀벌레』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폐지더미에서 귀중한 우리 옛책들을 발굴, 복구해왔다. 퇴계문집 중간(重刊) 당시 현황을 기록한 1백50년전 일기가 폐지 형태로 버려진 것을 찾아내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고 다리미로 다려 「표구하듯 복구」해낸 일 등이 그의 작업목록을 채워왔다. 17세때 서점 점원으로 책과 인연을 맺은 그가 고서적을 전문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금항당」이라 불리던 자신의 서점을 해방 직후 「통문관」으로 바꾸고 나서부터. 『광복이 되자 그동안 일인 학자들이 총독부를 배경으로 우리 옛책들을 휩쓸어버리던 것에 생각이 닿았어요. 그 책들이 흘러나오자 전문적으로 다뤄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경성제대 오구라교수에게 뺏긴 것으로 알려진 「월인석보」, 깊은 산사에 보관돼오던 천하귀중본 「월인천강지곡」, 상해 임정이 발간해 책처럼 묶은 「독립신문」 등 국보급 고서들이 그의 손을 거쳐 안전한 도서관으로 인도됐다. 고유섭 김원룡 이희승 최순우 등 국학의 대가들이 그의 단골이 되고 진단학회 서지학회 등이 통문관을 중간거점으로 삼았다. 고서점 하나가 국학자료 보급기지로 돼갔다. 이같은 점들을 인정받아 94년에는 서울시가 정도 6백년을 맞아 정한 「서울을 만들어온 사람들」에 세종대왕 황영조 등과 함께 뽑히기도 했다. 그는 올해 초에야 통문관을 아들에게 맡겼지만 은퇴는 없다. 그간 개인서재에 모아온 「청구영언」원본 등 희귀본 1만여권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상한 책들을 매만져주고 하나하나 목록을 작성합니다. 지금 3천여권째 하고 있습니다. 귀가 먹어 보청기를 써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눈은 아무 탈이 없습니다. 제가 돌본 옛책들이 이젠 저를 살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