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 〈17〉 경애와 나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내가 종태의 아내에게 전화 온 이야기와 투서에 대해 말하자 경애는 입술을 비틀고 실소했다. 예전 같으면 나를 실컷 혼낸 다음 욕을 퍼부어가면서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었을 테지만, 모든 게 부질없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한 시간 뒤에는 집에 들어가 봐야 한다던 경애는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실 때까지도 왜 만나자고 했는지 운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가 먼저 『일어날까?』하고는 옆자리에 놓았던 코트를 집어들었다. 내 표정이 퍽 의아했던 것일까. 경애가 기운없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돈 좀 빌려달라고 만난 건데, 지금 네 코도 석자인 것 같아서…』 『돈?』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 사실 빚 때문에 이혼하는 거야. 그 남자 월급까지 차압당할 형편이거든. 그 남자가 서류상으로만 하는 편법이라면서 이혼서류를 만들어왔더라』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찻집을 나오자 꽤 추웠다. 요란한 불빛과 술꾼과 연인들로 어지러운 거리로 내려서며 경애는 묵묵히 말했다. 『난 진짜 이혼할 거야. 서류로만 하는 거 아니고』 『무슨 소리야?』 『일 터지니까 그 남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 줄 아니? 도로 살 맞대고 살 마음 하나도 없어. 하긴 내가 어리석은 거지. 십 몇 년을 오직 누굴 위해서 살았다는 게 얼마나 옹색하고 못나빠진 거야. 난, 혼자 살 거야』 경애를 태운 택시가 떠난 뒤 나는 일부러 한참을 걸어나와 차를 잡았다. 집에 와서 현관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내 머리속은 멍했다. 그 모습이 애리에게는 심각한 얼굴로 비친 모양이다. 『언니, 내일 학교 안 나가?』 『성적 마감일이라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왜?』 『나 들어갈 오피스텔 알아보러 가기로 했거든. 엄마하고. 아마 엄마 집에서 며칠 있다 올 것 같아』 『그거 반가운 소리네. 취직은 결정된 거니?』 『응. 근데 언니하고 정들어서 떨어져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애리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굴튀김을 한 개 집어 입에 넣는다. 나는 젓가락을 놓아버린다. 학교에 갈 생각을 하니 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꼭 가야만 했다. 처리할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