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왜 꼭 이런 식으로 자신을 왜곡시키고 축소시키고 평가절하시켜야만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년간 그 아이를 지배해온 질서의 힘이, 그 아이를 부친인 그분께 무조건 순종하게 하고 있었다. 결국 6.29에 대한 보안은 완벽하게 지켜진 셈이다. 나와 큰아이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6.29가 선언되기 직전 그분은 다시 한번 그분 선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27일 오전 그분은 자신의 집무실로 이종률공보수석과 김성익비서관을 불렀다. 철저한 보안속에서도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노대표가 제의한 6.29를 전폭 수용한다는 공식발표를 해야 할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었다. 어차피 노대표의 역사적 선언에 진정한 생기를 불어넣어줄 역사적 담화문을 발표해주는 일까지가 이 일에 대한 그분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제대로 된 내용을 담은, 올바른 효력의 담화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철저한 보안속에서도, 적어도 담화문 작성자에게 만은 솔직하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날 아침 그분이 두 비서관을 부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놀라운 소식이 있네』 두 비서관은 그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직선제를 받아들이겠어. 그렇다고 의원내각제에 대한 내 소신이 변한 것은 아니야.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국민들이 지금은 원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지. 국민이 원하니 기꺼이 받아들이자 이거야. 국민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해내는 것이 정치지. 군에선 이미 비상출동준비가 다 돼 있어. 그러나 난 비상조치같은 것은 절대 명령하지 않겠어. 경제가 위축되고 올림픽에 치명상을 주게 될테니까. 올림픽은 아름다운 돌파구야, 그걸 망칠 순 없지. 국민들은 이제 최루탄냄새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어. 더이상 소요사태, 사회혼란, 최루탄, 독재에 대한 불안으로 국민들을 괴롭힐순 없어. 유신때 너무 질린 나머지 국민들은 지금 내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고 싶다는 기막힌 갈증을 갖고 있어. 이건 절실한 거야. 이제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해 국민이 내게 원하고 있는 그것을 자신있게 양보해 주는거야. 직선제를 과감히 받아들여 당당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결심이야』 그 분이 다시 말했다. 『이런 모든 내용의 노대표 건의가 있고 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담화문을 발표하도록 했으니, 이 의미있는 결심이 국민의 심금을 울리도록 좋은 담화문을 서둘러 준비해 줘야겠네』 그리고 그분은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 작은 글씨의 일정표였다. △6월29일〓노대표가 당중집위를 계기로 직선제를 받자는 건의를 하게 돼 있다는 것. △6월30일〓오전엔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절차를 거쳐 당정각료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것. 이 제의는 다시 국정자문회를 거치게 되리라는 것. △7월2일〓이 모든 것을 완전수용하겠다는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예정돼 있다는 것. 간략하지만 역사적이고 폭탄적인 일정표였다. 그분의 음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활기에 차있었으므로 두 비서관은 말을 잃었다. 지시사항을 받아쓰며 두 비서관은 숨이 막혔다. 직선제도 숨막히는 반전이었고 살신성인도 숨막히는 역전이었다. 이런 드라마, 이런 폭탄선언을 지시사항으로 받아쓰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음성에선 황홀한 활기만이 느껴졌다. 번민도 주저함도 없었다. 대통령의 그 믿을 수 없는 활기, 대통령이 말한 그 믿을 수 없는 내용의 파격에 압도되어 두 비서관은 겨우 지시사항만 받아썼을 따름이었다. 두 비서관이 대통령집무실을 물러나올 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담화문에서 분명히 말해. 4.13을 철회한다고 분명히 말하란 말이야』 D데이 하루 전날인 28일은 조용히 왔다. 아무도 하루 후에 있을 중요한 정치선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전날 그분은 아무도 모르게 노대표를 최종적으로 만났다. 용기와 소신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모든 일을 주저없이 계획대로 밀고나가라고 그분은 노대표에게 마지막으로 애정에 찬 격려와 지시를 내렸다. 일요일답게 조용히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그분은 가벼운 콤비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김성익이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내 내려갔다 곧 오리다. 어제아침 불러서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면서 담화문 작성을 지시했더니 놀라서 정신을 못차려. 놀란 심정으로야 제대로 된 담화문이 나올리 없지. 내가 가서 잘 설명해 기막힌 명문이 나오도록 도와주고 올테니 기다리시오』 그분은 소년처럼 웃었다. 그날따라 난 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산은 이미 진행중인데,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은 눈보라같이 가차없는 것이라는데, 그분의 소년같은 저 천진한 웃음은 대체 이 하산에 어울리는 것인지 멍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렇게 소년처럼 웃어대는 그분이나, 하루라도 빨리 옛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에 절절매는 나자신이나,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을 너무 철없이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날 쓸쓸하게 했다. 그렇다. 권력으로부터 하산하는 우리내외의 모습은 어이없도록 무장해제적인 데가 있었다. 그날 오후 담화문작성자 김성익비서관이 큰아이 재국을 찾아 왔다. 예기치 못한 방문이었다. 보안에 겹겹이 싸인 6.29의 몇 안되는 청취자중 하나인 그의 방문은 예사롭지 않았다. 재국과 마주앉아 김비서관은 진지하게 그러나 다짜고짜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대통령께선 모든 국민이 소망하는 절호의 호재를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국민앞에 내놓으려 하고 있다. 나라에 대한 각하의 우국충정을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난 이미 각하로부터 두차례에 걸쳐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이유와 당위성을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직선제를 통해 다음 정권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절대명제 앞에서 자신을 던져넣어 나라를 구하시겠다는 용단에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각하를 모셔오면서 각하는 언제나 나라가 최우선이었다는 사실에 감동해왔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각하의 표현대로 권력의 갑옷을 벗고 황야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아닌가. 이 순간까지도 자신의 안전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는 각하의 모습은 내겐 충격 이상이다. 5공화국 출범과정에서 있었던 문제들을 생각해보라. 불이익을 당해 증오의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국민이 분명 환호하고 감격할 이 선언만큼은 어떤 이유로든 정직하게 각하의 이름으로 선언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5공화국이 지닌 역사의 매듭이 풀리고, 임기후 정치보복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는 힘이 되며, 그것이 결국 임기후 각하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선언은 각하의 것이며 필연적으로 각하의 이름으로 선언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비서관의 그 설득은 큰아이 재국에게 말할 수 없는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김비서관이 지금 재국에게 다그치듯 쏟아놓고 있는 그 절절한 말들은 며칠전 자신이 부친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호소했던 바로 그 간절한 간청과 기막히도록 똑같은 것이었다. 김비서관의 의견을 듣자 재국은 이 모든 것이 부친의 앞날과 운명적으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준엄한 사실에 숨이 막혔다. 『문제는 아버님께선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시면서도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아버님에겐 단 한가지 원칙밖에 없으십니다. 즉 나라의 이익이 우선하는 결정이야말로 최고의 결정이라는 원칙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노대표께 모든 영광을 내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자신이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라고 믿고 계십니다. 아버님이 그렇게 믿고 계시는한 아무도 그 결심을 바꾸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아버님께서는 노대표의 영광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예 만나는 것조차 삼가고 계실 정도입니다』 아버님의 결심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정말로 불가능하다고 재국은 허무에 차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재국에게도 마지막 근심, 마지막 반전에 대한 처절한 기대가 있었던 것일까. 재국은 그날 오후 아버님과 김비서관의 면담을 주선하고 있다. 그날 오후 3시40분. 김비서관은 재국과 함께 청와대본관 대식당에서 그분을 만나고 있다. 그날 김비서관의 충정을 다한 간청은 그분에겐 가족인 나와 재국의 목메인 간청이후 두번째 맞는 중요한 도전이 됐다. 그러나 그 절절한 호소앞에서도 그분은 요지부동이었다. 『민주주의를 해보자는 것이 내 소신이고 철학이야. 자유당과 공화당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을 조였던 정치악순환의 저주를 내 시대에선 끊어버리겠다는 것이 내 마지막 결심이야. 민주화조처를 누가 제의하면 어떻고, 민주화영웅이 누가 된들 그것이 뭐가 그토록 중요해. 국가란 엄숙한 거야. 그 앞에서 감히 개인의 영광을 계산하는 것처럼 저속하고 치사한 발상은 없어』 『국가란 엄숙한 거야. 그 앞에서 감히 개인의 영광을 계산하는 것처럼 저속하고 치사한 발상은 없어』 그분의 이 마지막 말, 이 기막히고 찬란한 웅변에 두사람은 말을 잃었다. 그 짧고 불길이 솟는 웅변으로 그분은 목이 메인채 식당가운데 앉아 있는 두사람의 충정을 단번에 무력화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좀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이 계획을 알았더라면 그분은 훨씬 더 심각한 도전과 사정없는 만류에 부닥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6.29는 사산되거나 적어도 난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분은 옳았고 결심은 추상같았다. 그날 몹시 늦은밤, 연희동 노대표댁에 그분으로부터 직접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속에서 그분 음성은 강하게 지시한다. 『노대표, 내일 예정된 시간에 차질없이 시행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