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18〉 두 번씩이나 지리멸렬이라고 말한 부분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인지, 공부의 지리멸렬은 짧은 경험으로도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생활의 지리멸렬에 대해선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저씨에게 아직 어린 여자 아이와 그 많은 시간 동안 편지를 주고 받게 했던 것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그 편지가 지리멸렬을 견디는 작은 힘도 되었겠지요. 귀국한 다음 아저씨는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아저씨는 왜 편지를 쓰지 않는 것일까요. 이제 외로움은 여자 아이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서 다시 아저씨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어떤 신간을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그 아래 「하석윤 기자」하고 아저씨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다시 신문사에 복직을 했다는 얘기겠지요. 그래, 그동안 편지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을지 몰라. 다시 쓰기 사작하는 아저씨의 기사를 본 날 마음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매주 화요일마다 아저씨의 이름은 나오는데 아저씨의 편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땐 내가 먼저 편지를 쓸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부치지 않을 거라는 걸 먼저 알면서도 밤의 밑바닥이 하얘질 때까지 길고 긴 편지를 쓴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편지처럼 신문사로 보내면 아저씨가 받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귀국한 다음 첫 편지는 아저씨가 써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편지의 약속도 그랬고, 있던 곳을 옮긴 것도 아저씨이니까. 그러나 아저씨의 편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어 스물두 살이 된 다음까지도…. 아저씨의 편지를 받고 싶습니다. 아니, 이제는 서영이가 아저씨를 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가 새해 아침 스물두 살이 되기까지, 마음 속으로만 혼자 안타깝게 간직해온 아저씨에 대한 서영의 이야기입니다. 서영은 조용히 스크랩 북과 편지 묶음을 접습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서영을 서영이만큼 잘 아는 누군가가 서영을 관찰하며….